16장은 갈릴리 사역의 후반부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다시 한 번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이 당하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갈릴리를 떠나 이스라엘의 최북단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받으시고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드디어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십자가의 여정을 시작하십니다. 본문에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기초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로서 가져야 할 제자도에 대해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1-4)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님은 데가볼리 지역에서 유대인의 땅인 마가단에 도착하셨습니다(15:39).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하였습니다. 이번에 나아온 종교 지도자들은 아마도 전에 예루살렘에서 온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그런데 지난 번과 다른 점은 사두개인들이 합세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과 연합하여 예수님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서로 같이 할 수 없는 색깔이 완전히 다른 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매우 정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스몬 왕조 시대부터 귀족계급을 형성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파괴된 후 그들의 존재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A.D.70년). 사두개인이라는 뜻은 “의로운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다윗과 솔로몬의 제사장직을 수행했던 사독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시대에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의 상당수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시작한 헬라화 작업에 적극 찬성하였는데 이는 마카비 운동을 지지하던 바리새인들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접하였고 몸의 부활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마 22:23, 막 12:18, 눅 20:27, 행 4:1-2) 천사도 영도 믿지 않았습니다(행 23:8). 그들이 모세오경을 성경으로 받아들인 것과 몸의 부활과 영과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은 모순입니다. 아마도 신구약 중간기에 천사와 마귀에 대한 이론이 정립되면서 그들은 이에 반박했던 데에서 연유된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것에 대해 공동의 목표를 갖게 되자 연합할 수 없는 자들이 손을 잡았습니다. 표적은 반박할 수 없는 기적적인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표적을 보이셔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왜나하면 그 어떤 표적을 보여도 그들은 믿지 않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표적을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서 꼬투리를 잡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탄이 행하는 표적이 아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은 사탄도 표적을 행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능력은 바알세불을 힘입어 행하는 것으로 매도하였습니다(12:24). 이번에 그들이 요구한 것도 예수님을 시험하는 악의적 요구였습니다.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책략에 반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표적 대신 그들의 영적 분별력 없음을 날씨의 비유를 통해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연 현상을 보면서 날씨를 예측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저녁에 붉은 하늘을 보면 날이 좋겠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고 예측하였습니다. 특히 배를 타는 사람들은 그 날 아침이나 저녁의 해를 보면서 출항을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날씨를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시대의 표적”은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실 것이라는 예언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와 다니엘서의 예언은 메시야가 오셔서 하실 일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언을 다루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고 곧게 하는 선구자임을 강하게 증거하였습니다(3:3). 구약성경의 예언의 흐름만 보아도 그들 앞에 서계신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의 증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사실, 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 사람들의 메시야에 대한 고조된 기대 등을 볼 때 그들 앞에 서계신 분이 메시야이심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것은 믿지 않으려고 작정한 것이고 거기에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악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달리 보여줄 표적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비판자들에게 특별한 표적이 필요없다고 답하셨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지식의 분야에서 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영역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분별은 마음이 열려 있고 환영하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관한 문제는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수용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은 그 시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12:39에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것은 불신하는 세대를 말합니다. 그들이 표적을 구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란하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음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신부는 참 남편이신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은 다른 데로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임을 여러 표적을 통해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고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표적이 필요 없고 오직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이것이 죄와 죽음 권세에 매인 인생들에게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하늘로부터의 가장 확실하고 크고 놀라운 표적입니다. 이 표적 하나만으로 예수님을 믿기에 충분합니다. 이 표적을 거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만이 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셨습니다. 그들의 거절의 결과는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수많은 설득의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런데도 거절하는 것은 그들에게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말해 줍니다.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는 말처럼 불길하고 두렵고 무서운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대한 거듭된 거절은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끝이 납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누룩에 대한 경계의 말씀(5-12)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북서쪽 유대인들의 땅에서 갈릴리 북동쪽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 방향으로 건너갔습니다(16:13). 예수님은 그 동안의 갈릴리 사역을 정리하시고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으로 가셨다가 다시 갈릴리 유대인의 땅으로 돌아오십니다(17:22,24). 그 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십자가 여행을 떠나십니다(19:1). 그런데 제자들은 떡 가져가기를 잊었습니다. 제자들은 긴 여행을 할 때에는 먹을 것을 준비해서 가져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칠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나서 남은 것이 있었는데 이를 무리들을 주거나 자기들의 먹을 것으로 다 사용했을 것입니다. 여행을 떠날 때 먹을 것을 준비하는 것은 제자들이 늘 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갈릴리 유대 땅 지역을 벗어나심으로 떡 챙기는 것을 잊었던 것 같습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제자들은 떡 챙기는 것을 잊어서 예수님께 무슨 꾸중을 듣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갑자기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룩”에 대해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떡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악한 영향력을 받지 말라고 하신 것인데, 제자들은 누룩과 떡을 연계시켜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고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의 충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찌기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천국의 침투하는 속성에 대해 설명하시기 위해 누룩을 긍정적인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13:13). 그러나 여기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악한 영향력에 대해 말씀하시기 위해 누룩 비유를 부정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누룩 비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영적 가르침을 생각하지 못하고 육적 차원에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을 여러 가지 면에서 성장해야 하는데 성장이 멈춘 아이와 같았습니다. 지금 현재 제자들의 수준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 계속 떡에 집착한 무리들의 수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육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어 예수님은 마음이 안타까우셨습니다.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예수님은 육적인 차원에 머물러 예수님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뜻이 무엇인지 서로 논의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작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의 기대치에 한참 못미쳤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영적 수준을 보고 마음이 답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수사 의문문의 형태를 사용하심으로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병이어 사건을 상기시켰습니다. 그 때에 그들이 거둔 것이 몇 바구니였는지, 칠병이어 사건에서 그들이 몇 광주리를 거두었는지 생각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두도록 하신 이유는 예수님은 작은 것으로도 수만 명의 무리를 먹이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행을 떠나는데 떡을 준비하지 않은 것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들의 먹을 것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은 친히 공급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떡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떡의 차원에 집착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라고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이 언급하신 누룩이 떡의 누룩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여행 중 가져갈 떡에 대해서 집착하였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엉뚱하게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육의 생각이 아닌 영적인 생각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신학적으로 서로 섞일 수 없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하여 죽이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가 생기자 그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대처하는 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갖는 특권을 예수님께 빼앗긴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유대 사회의 정신적, 영적 지주로서 백성들이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리자 그들은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면 그들은 빈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그 동안 내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기 쉽습니다. 그 동안 내가 살아왔던 삶의 패턴이 있는데 이를 버리고 새로운 삶의 패턴대로 살아가야 하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자기가 누리고 있는 편안함과 즐거움을 포기해야 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이 나의 삶의 중심이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냥 예수님이 나의 삶의 악세서리 정도로 삼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나의 삶에서 점점 밀려나 이제는 나와 상관 없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것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과 멀어지는 삶이 됩니다(15:8).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입니다. 또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위선과 교만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의 양들을 먹이는 목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사람들의 존경과 주목의 대상이 됩니다. 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때 그들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교권주의와 위선과 교만에 빠져 살게 되면 사람들에게 악한 누룩을 끼치게 됩니다.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교만과 위선에 빠지게 될 때 사람들이 교회에 실망하고 영생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불행한 일을 겪게 됩니다. 교만과 위선에 빠지면 영적 지도들은 영적 맹인이 되어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고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격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23:13).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13-14)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 곳은 갈릴리 호수 북쪽 40킬로 떨어진 곳으로 헬몬산 남쪽 자락에 위치하였습니다. 이 곳은 이스라엘 전체 지역 중에서 최북단 지역으로 원래 이름.은 판의 도시라는 뜻의 ‘파네아스’입니다. ‘판’은 그리스 신화의 목축의 신으로 몸은 염소이고 허리 위로는 사람의 모양이며 머리에 뿔이 달려 있습니다. 가이사랴는 판을 숭배하던 중심지였고 신전도 있었습니다. 이 곳은 분봉왕 빌립이 세운 신도시로 자기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고 하였고, 로마 황제 가이사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란 이름을 덧붙였습니다. 그 당시의 황제가 티베리우스이었는데 빌립은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을 지어 황제에게 헌정하였습니다. 앞으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북단 빌립보 가이사랴에 출발하여 유다의 남쪽으로 가십니다. 16:21부터는 예수님의 남쪽으로 가는 여정을 기록한 것으로 여기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길 위의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이후의 모든 사건은 길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것이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사람들의 견해를 묻는 것이고 두 번째 질문은 제자들의 개인적인 견해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이 사역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예수님에게도 수많은 사람들을 모여들자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이 세례 요한을 죽인 분봉왕 헤롯이었습니다(14:2). 엘리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는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 때문이었습니다(말 4:5-6).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야의 선구자를 예언한 것인데 사람들은 이를 잘못 이해하여 선지자 엘리야를 보낸다는 예언을 예수님께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예레미야라고 하였는데, 다른 복음서와 달리 마태는 예레미야를 추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람들에 의해 배척받은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와 연관시켜서 말했을 것입니다.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인물에 빗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까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인물을 보내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예수님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고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분입니다. 그들의 대답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뭔가 핵심이 빠진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다양하지만 예수님을 위대한 인물로 여기고 있다는 것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지금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말하기도 하며 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 말합니다. 또한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하며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노동자의 해방자로 여깁니다. 또한 기업에서는 섬김의 리더십의 원조인 예수님을 위대한 경영가로 보기도 합니다. 종합해 볼 때 오늘날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에 대한 견해의 공통점도 그 시대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인물로 본다는 점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15-16)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원문에서는 “너희”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은 뭐라고 하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일반적 견해와 다른 제자들의 경험에서 나오는 그들만의 답을 기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동안 예수님과 함께 동거동락하면서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천국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을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아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이 경험하지 못한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것이나 물 위를 걸어오신 사건이 그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하며 예수님께 절하며 경배하였습니다(14:33).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을 경험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민낯을 알고 실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알면 알수록 더 놀라운 분이십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골 2:9).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보고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요 1:14). 또한 그는 예수님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였고 그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고백하였습니다(요일1:1). 제자들도 예수님을 함께 있을수록 그들의 놀라움은 더욱 커졌습니다.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시몬 베드로가 제일 먼저 나서서 고백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였지만 이는 개인고백이면서 제자들의 고백을 대표합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다가 예수님이 질문하시는 그 순간 깨달아서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그가 체험한 모든 것을 종합해서 결론을 내린 고백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하고도 예수님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시자 예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누구에게 가오리까?”하며 예수님 안에 영생의 말씀이 계심을 고백했습니다(요 6:68). 이런 고백들이 하루 아침에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며 함께 하면서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한 것은 영어로 You are the Christ로 원문에는 주라는 말 대신 ‘당신’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주’라는 말은 우리말에만 있는 것으로 존대말이 있는 우리말 성격상 “당신은…”이라고 번역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메시야를 말합니다. 메시야는 히브리어로 ‘구원자’를 말하며 메시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에서 왕과 제사장이 기름을 부음을 받아 세움을 입었습니다. 선지자가 기름부음을 받은 기록은 성경에 엘리사가 유일합니다(왕상 19:16). 베드로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요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왕으로서 섬기고 복종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기름 부은 받은 다윗 왕과 연관시킵니다. 유대인들은 다윗과 같은 왕이 다시 오실 것을 믿었는데 이를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칭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의 씨를 통해 다윗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고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삼하 7:12-13 ). 그 약속은 그 나라의 희망이 되었고 다윗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셔서 원수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의 신인 판의 도시이자 황제 숭배의 도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들이 고백하는 왕은 판과 같은 죽은 신이 아니고 신으로 숭배되는 인간에 불과한 황제도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로마 당국이 들었다가는 그들이 반역죄로 몰릴 수 있는 위험한 고백입니다. 그들은 이 고백을 이방의 도시인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했다는 것은 큰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숨을 바쳐서 충성하고 복종하고 섬겨야 할 유일하신 왕이라는 고백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예배와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유일한 왕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예배자로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원하는 정답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한 개인이 그리스도라고 칭하는 것은 이 절이 처음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으로부터 본질적인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그 사이에 가르침과 배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와 구원받은 죄인의 관계로 발전하고 깊어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영원히 의지할 분, 나의 왕, 순종과 경배와 찬양의 대상”으로 고백했습니다. 이는 본질적인 관계의 변화입니다. 이제는 제자에서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순간이 가장 위대한 역사적인 순간이요 전환점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모든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고백이 있어야 제자도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도록 기도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도 그들이 그 고백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예수님과의 본질적인 관계성이 맺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고백과 교회(17-19)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자 예수님은 베드로에 대해 엄청난 축복을 선언하십니다. “바요나”는 말은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시몬”은 베드로의 원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을 한 것은 세상의 그 어떤 복보다도 큰 복입니다. 이는 죄와 심판로부터의 구원을 주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과 심판의 문제는 인생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세상의 근본문제도 죄와 죽음 문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마음의 수련도 쌓아보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인생을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는 인간의 노력으로 상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예의 자식은 역시 노예입니다.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려면 누군가가 그를 값을 주고 사야 합니다. 그런데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그 사망은 육신의 죽음 뿐 아니라 지옥의 형벌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내어 주시고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이 값은 너무 비싸서 우리가 갚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값없이 거저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자가 되십니다(1:21). 우리가 죄에서 놓임받고 영생을 누리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축복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나의 문제를 안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혼자서 끌어 안고 자기 혼자 책임지려고 무거운 짐을 진 자처럼 살아갑니다. 자기의 고민을 말할 데가 없어 내면이 병들어갑니다. 심리상담을 받아보지만 잘 들어주고 공감해줄 뿐 더 이상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합니다. 물론 자기의 고민을 속 시원히 털어놓음으로 일시적인 문제해결을 받지만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고민을 들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제약이 없습니다. 시간 약속을 할 필요도 없고 일정한 장소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제약 없이 우리 주님께 나아가 나의 문제를 아뢰고 그의 도우심을 구할 때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특권입니다. 자녀는 부모님에게 나아가 필요한 것을 간구합니다. 그러면 부모님은 자녀의 필요를 아시고 다 채워주십니다. 부모는 자녀의 응석도 잘 받아 줍니다. 이처럼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게 필요를 모두 다 아시고 친히 공급하십니다(6:32).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상속자입니다. 상속자는 아무나 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들의 핏값으로 사신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시며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는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롬 8:17).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을 살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롬 8:2). 하나님의 영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우리 안에 계심으로 우리는 주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요나”, 즉 ‘요나의 아들’이라고 하심으로 육신의 아버지를 언급하셨고 이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심으로 하늘의 아버지를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둘을 대조함으로 깨달음의 축복이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할 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도록 기도해야 합니다(엡 1:17-18).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17절에서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셨고 이 절에서는 “너는 베드로라”고 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은 베드로의 인간적 배경을 말해주는 것이고 “베드로”라는 것은 그의 신앙적 지위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기초해서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반석’이란 뜻이고 아람어로는 ‘게바’입니다. 이 이름은 예수님이 시몬을 부르실 때 소망을 가지고 새롭게 지어주신 이름입니다(요 1:42). 이는 장차 베드로가 교회 역사에서 지도자적 위치를 갖게 될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의 뜻처럼 예수님은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교회를 세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는 구절은 베드로라는 이름의 뜻이 반석이라고 생각하고 한 개인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반석을 신앙고백으로 해석해서 교회는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기초한다고 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교회가 한 개인의 전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인간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신약은 그리스도를 반석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0:4). 예수님은 교회의 반석이 되십니다. 교회의 중심은 사제나 목회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었지만 그 돌이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벧전 2:7). 예수님은 신앙고백한 베드로 개인에 대해서는 교회의 리더 역할을 하도록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내 어린 양을 치라”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그에게 맡기셨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전에 제자들 사이에 리더십을 갖고 있었습니다. 오순절 후에도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를 놓는데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었고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교회를 세웠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지도자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가 놓여진 이후에는 그의 이름을 사라집니다. 베드로가 반석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신앙고백을 한 후에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방해함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고 책망을 들은 것을 볼 때 불완전한 사람이 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반석이 되어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개인의 우월성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특별한 사람이지만 다른 제자 위에 있거나 그들과 구별된 사람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같이 합심하여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초기에는 리더로 나오지만 예루살렘 총회에서는 야고보가 리더로 나오고 그 후 바울이 등장하여 이방인 가운데 교회를 세우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그 기초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사복음서에서 마태만이 교회라는 말을 유일하게 사용하였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예언한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이는 국가 단위의 공동체가 아닌 믿음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구약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단위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기록했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물으시며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하시면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 개념을 정립하셨습니다(12:48-50). 이 가족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음부는 영어로 Hades로 죽은 자의 영역이라는 말의 스올과 같은 말입니다. 음부의 권세는 the gates of Hades로 스올의 문을 말합니다. 문은 성의 입구로 성의 입구를 지키는 것은 성의 안전을 지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음의 통치와 권세를 죽음의 문라는 말로 환유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은 죽음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21절에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언하십니다. 제자들은 물론 그 당시에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적들이 예수님을 죽일지 모르지만 죽음은 그를 정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어갔습니다. 그들의 부활에 대한 증언으로 인해 교회는 박해를 받고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순교를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핍박으로 교회는 흩어지고 멸망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 권세를 이기심으로 부활하셨듯이 십자가와 부활로 세워진 교회는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중세시대에는 기독교의 타락으로 교회가 힘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를 다시 부흥시키고 전 세계를 뒤덮게 하셨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계몽주의로 인해 교회가 위축되었습니다. 볼테르는 100년 후에 전 세계의 교회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이 성서공회가 됨으로 교회는 망하지 않고 성장하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오늘날은 세속화화 탈종교화로 인해 교회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잠깐 흥하고 사라진 종교가 많은 것을 보고 이러다가 교회도 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숱한 위기 속에서도 성장해왔습니다. 예수님은 “내 교회”라고 말씀하심으로 교회는 사람이 세운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주인이신 교회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세력도 결코 예수님이 머리이신 교회를 이길 수 없습니다.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신앙고백의 기초 위에 그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 개인에게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열쇠”는 일반적으로 권세를 말하는데 베드로 개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역할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시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사명은 사람들을 천국에 가도록 안내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함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베드로는 전국 각지에서 온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온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천국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 사건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나라의 문을 여는 데 열쇠를 사용한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침으로 그들의 죄가 사해지고 그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열쇠의 은유를 말씀하신 후 ‘매는 것’과 ‘푸는 것’의 권세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매는 것과 푸는 것은 랍비의 권세를 말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가르치거나 훈육할 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칠 때 이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교리적으로 그들이 해야 할 일과 그러지 않아야 할 일을 구분할 때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을 베드로를 통해 천국의 문을 여시고 매고 푸는 일은 그 후에 교회가 탄생하고 성장하면서 계속 진행되어져 왔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강림 설교 이전에는 성령 강림 이전이므로 교회 탄생 이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오천 명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인 무리들이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는데 이것이 초대 교회의 모습입니다(행2:42). 교회의 탄생 이후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리고 그 이후 복음을 영접한 자들에 의해 ‘매고 푸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그 복음을 계속해서 선언함으로 매고 푸는 권세를 나누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은 그들의 죄의 사슬에서 풀어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그냥 죄의 사슬에 묶인채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묶여 있으므로 천국문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매고 푸는 일’에 대한 다른 표현이 요한복음 20:23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제자들은 성령을 받음으로 인해 그들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지를 선언할 수 있습니다. ‘매고 푼다’는 것은 죄 사함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그가 신앙고백을 통해 받을 축복에 대해 배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 고백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입니다. 고백 없는 신앙은 불완전한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혈루증 앓던 여인이 몰래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치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찾으시자 그녀는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라고 하시며 그녀의 믿음을 많은 사람 앞에서 공식적으로 드러내심으로 그녀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눅 8:45-48). 로마서 10:9-10은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온전한 믿음은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마음의 믿음’과 ‘입술의 고백’이 병행되어야 온전한 믿음입니다. 마음의 믿음이 입술의 고백으로 나타날 때 그 믿음은 견고해지고 확증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믿음과 입술의 고백은 서로 상호 보완 작용을 합니다. 마음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입술의 고백을 통해 마음의 확신을 얻게 됩니다. 소위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밋밋한 신앙으로 인해 확신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부터 신앙적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성경의 내용도 잘 알고 있으며 예배나 기도하는 문화에 아주 익숙하지만 믿음의 확신이 없어 방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의 믿음의 불확실’은 입술의 고백으로 믿음의 선명하고 확실하게 됩니다. 요즈음에는 많이 퇴색했지만 개혁교회에서는 웨스트민스터 문서, 벨기에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도르트 신경 등 신앙고백서를 공부해왔습니다. 모태신앙을 가진 분들 중에서 의외로 성경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과 교리체계를 갖추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교리의 정확한 지식을 알고 이를 입으로 신앙고백함으로 모호한 신앙에서 벗어나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신 예수님(20-23)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마음에 흡족해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아무에게도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이르지 않도록 경고하셨습니다. 이는 오병이어 사건 이후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 삼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잘못된 그리스도관을 갖게 될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는데 그 그리스도가 하실 일이 무엇인지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구원을 이루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죽으실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로부터”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끝나고 이제는 빌립보 가이사랴로부터 출발하여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대전환을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4:17에도 나오는데, 그 때는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전파히시면서 갈릴리 사역의 시작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제는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 명확하게 드러내십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부활은 그리스도로서의 선택적인 사명이 아니라 필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와 같ㅊ은 종교 지도자들에 손에 의해 재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 살아나야 할 것”은 영어로 must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 그리스도로서 가셔야 할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다가오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갑자기 아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의 사명이라는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고난 받고 부활하실 메시야에 관한 이 예언은 네 번의 예언 가운데 이 절이 첫 번째입니다(16:21; 17:22-23; 20:17-19; 26:2).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함을 드디어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현재 이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격적이고 슬픈 소식이지만 제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혁명을 일으켜 자기 민족을 해방시키고 왕이 되실 것으로 생각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서 가셔야 할 길은 십가가의 죽으심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왕이 아닌 십자가의 대속제물이 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일찌기 세례 요한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치며 이를 언급했습니다(요 1:29). 이 사실은 무리들은 그렇다치고 제자들조차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와 죽음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와 구속의 비밀이 담긴 것이기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타락하자마자 이 구속의 계획을 미리 세워두고 차근차근 진행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택하시고 그의 씨 가운데 구원자를 주셔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심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 22:18). 그 복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 복입니다. 또한 이 복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축복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구원역사의 모형을 만들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예비하시고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번창하게 하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린 양을 잡아 그들의 집 문설주와 인방에 그 피를 바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지나가게 하셨습니다(출 12:21-23).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속의 과정을 이해하도록 하시기 위해 복잡한 구약의 제사제도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백성의 죄를 위해 중보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때 꼭 필요한 것은 짐승의 피를 흘려 백성의 죄를 속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자기를 드려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히 7:27; 히 9:12). 예수님은 큰 대제사장으로 십자가로 인류의 죄를 다 대속하시고 우리가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히 4:14; 히 9:24). 우리는 때를 따라 돕은 은혜를 얻기 위해 언제 어디서든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속죄”라는 개념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서는 친히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더 나아가 다윗 왕의 통치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함을 받은 성도들의 나라의 성격을 미리 알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다른 군주와 달리 목자처럼 자기 백성을 돌보았습니다(삼하 5:2). 예수님은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목자처럼 사랑과 온유와 겸손으로 다스리십니다(슥 9:9; 2:6). 십자가와 부활로 이룩한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통치하실 나라의 성격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원의 왕이십니다.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다는 말을 듣자 충격을 받고 주제 넘게 앞에 나서서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는 마치 충격받은 다른 제자들의 대변인처럼 말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 메시야의 죽음의 운명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구원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예수를 붙들고”라는 표현은 took him aside(NIV)로 예수님을 옆으로 데리고 가셨다는 뜻입니다. “항변하였다”는 말은 began to rebuke(NIV)로 ‘책망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제자가 스승을 가르치거나 책망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 그런데 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왕께 순종하며 경배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 생각에 예수님을 끼워 맞추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신앙고백과는 정반대의 자세입니다. 그는 말만 “주여”라고 했지 실제로는 예수님을 가르치려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적 생각의 오류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결코”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가장 강력한 부정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개입해서 그의 주인이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보호하여 고난받거나 죽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처럼 큰 소리치고 자신만만하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잡아가는 대제사장의 종들과 군인들을 향하여 칼을 휘둘렀습니다. 이렇게 호기를 부리던 베드로는 계집 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비겁한 자가 되었습니다(마 26:69-75). 그의 자신만만함 때문에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는 스승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렇게 말하게 한 배후를 지적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하여 메시야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의 뜻을 섬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4:1-11). 이제 사탄은 다른 전략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로 방금 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 복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사탄이 되었습니다.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것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를 말합니다. 이는 사람이 죄에 넘어지거나 믿음을 부인하게 하는 것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그가 이렇게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메시야의 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원수 나라 로마를 물리치고 왕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악인을 심판하는 구원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고난받고 죽임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니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물론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지나친 행동을 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에 붙들려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의 방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그가 하실 일에 대해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그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보호할 것이라고 자신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새롭고 더 위험한 형태로 그의 제자를 대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때로는 호의적인 친구보다 더 가공할만한 무기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착각 속에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서 충격적인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칭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자에서 “사탄”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몽환에서 깨어나서 하나님의 방법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책망하면서 말리려 했던 것은 그가 했던 신앙고백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는 입술의 고백은 그리스도라 하고 실제 삶은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입으로만 고백하고 행동은 따르지 않는 모습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모습과 싸우십니다. 예수님은 이 후 세 번이나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의 일을 생각하는 것과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일을 앞세우고 자기 욕심과 즐거움이 우선시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신앙의 궤도를 수정하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24-28)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예고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주제 넘는 발언으로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심으로 배후에 역사하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도 당연히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도록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도의 핵심을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삶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라고 하심으로 열두 제자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제자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무리와 제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제자 양성과 무리들을 위한 사역이 구분되지만 구원과 영생을 받은 성도들은 모두 이런 구분 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시에 십자가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처형방법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제국의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과 소요를 잠재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가장 잔인한 사형방법인 십자가형을 이용했습니다. 그 당시 중죄인들은 자기가 직접 십자가를 지고 처형 장소까지 가야 했습니다(27:26,35). 처형 장소에 도착하면 그들은 손목과 발목에 못을 박혀 피를 흘리게 해서 장시간 동안 고통하더 죽어야 했습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의식을 잃었다 고통했다는 반복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를 제자도와 연관시키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는 대속의 십자가로 고통과 저주의 상징이지만 제자들에게는 장차 영광과 승리를 얻기 위한 제자도를 상징합니다. 오늘날 십자가를 악세서리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주는 고통과 수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문제를 겪거나 힘든 일을 당할 때 그것을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소극적 의미이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자기부인과 십자가는 사실 같은 의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의 이기심과 안락함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 죄를 즐기고 싶은 마음과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자기의 개성과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대조해서 말씀하셨듯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듯이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고난도 적극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나아가 죄 사함 받고 그은 은혜를 누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해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싫어하는 것은 죄악된 인간의 본능입니다. 사람들은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원합니다. 같은 인생을 살아도 좀 더 편하고 좀 더 근사한 방법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되도록이면 은혜를 잘 누리고 사명은 회피하고자 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으면 대충하고 적당히 빠질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 없이 은혜와 영광과 성공을 누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람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은 역설적 표현으로 십자가의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뜻에 매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땅에 재물을 쌓아두고 땅에서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길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육체적인 존재를 지키고자 오래 살고자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인생을 살게 되고 그의 영혼에게는 죽음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13-21에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그 곡식을 곳간에 쌓아둘 곳이 없어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곡식과 물건을 쌓아두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쌓은 재물을 보고 흐뭇하여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혼잣말을 하며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날 그의 영혼을 데려갔습니다. 그러면 그가 쌓아 둔 재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삶은 이 비유의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물질적인고 육적인 가치관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 살면서도 고상한 척 하지만 이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탐심을 가지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두며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은 이런 욕심과 어리석음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게 됩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가치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자기만을 위해 곳간에 쌓아놓고 자기 만족을 구하지 않고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드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에 물질과 시간과 생명을 드리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자세입니다.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유익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의 목숨은 soul로 ‘영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온 천하”와 “목숨”을 대조시키셨습니다. 사람 중에 자기 영혼을 온 천하와 맞바꾸는 것은 어리석은 거래입니다. 그 만큼 영혼은 소중한 것입니다. 영혼을 잃고 온 천하를 얻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만일 사고를 대비해서 보험을 듭니다. 그러나 지극히 위험하게도 영혼을 위해서는 보험을 들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을 합니다. 설령 죽음 이후 심판을 의식하면서도 현실적 문제가 발등의 불이라 현세의 것에 집착하고 자기의 먼 미래를 대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유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유익한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부와 편안함과 즐거움을 위해 자기 영혼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영혼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일에 사용할 것인가 깊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가 가진 학식과 부와 가문과 사회적 명성을 예수님을 위해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진 것은 그리스도를 얻는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버렸습니다(빌 3:7-9). 그는 예수님 안에서 발견한 가치들은 세상의 것과 비교가 불가능함을 고백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영혼을 잃게 되는데 이것은 확실한 것이고 비참한 것이고 되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으면 예수님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을 얻는 자는 예수님과 연합한 자요 예수님과 연합한 자는 그의 죽으심과 함께 죄에 대해 죽고 그의 부활하심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영광도 주어지게 됩니다.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날에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며 자기를 위해 산 사람들에게는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결산할 날이 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것은 가장 공평한 원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에 다시 오셔서 각 사람에게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실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습니다. 반면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입니다(롬 2:6-10).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 죽기 전에 예수님이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이 절은 난해 구절 중 하나입니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얼마가 지나지 않아 예수님의 재림을 볼 것이다라는 말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왕권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떠올립니다. 이 구절은 NIV에 기초해서 보면 “여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은 그들이 인자가 그의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기 전에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살아 생전 예수님이 영광 중에 임하는 것을 다시 볼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예언은 엿새 후에 17장의 변화산 사건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셨는데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너무나 황홀하여 그 곳에 눌러 앉아 있고 싶었습니다. 변화산에서 본 예수님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환상 가운데 본 인자의 모습과 흡사했습니다(계 1:14-16).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건이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16에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은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이 오실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이제 승천하신 후에 성령 강림 사건으로 다시 제자들에게 오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