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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 종합, 성경 구절 묵상, 현대적 적용 주석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태복음 17:1-21)

17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후반기 사역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전반기와 후반기를 나누는 기준시점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전반부의 사역의 초점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는 것입니다. 반면 후반부 사역의 초점은 고난당하시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에 초점이 마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이 되심으로 후반부의 첫 단추를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제자들에게 십자가 후에 영광이 있음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엘리야를 보고는 구약의 예언이 누구를 가르키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예언된 메시야의 선구자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오자 산 아래 있던 제자들은 귀신들린 한 아이를 고쳐주지 못하여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한 아이를 고쳐 주시고는 겨자씨 한 알과 같은 믿음으로도 능히 산을 옮기는 일을 할 수 있음을 말씀해주셨습니다. 21-27절은 성전세에 관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 대상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가는 여정 가운데에서 이 말씀을 하심으로 성전의 기능이 종료되고 예수님이 친히 성전의 기능을 하심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암시하셨습니다. 

변형되신 예수님(1-3)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엿새 후”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신앙고백을 한 엿새 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하실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장차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엿새를 함께 계시고 제자 셋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기간의 분위기는 심각하고 불편하고 어색하였을 것입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장래 일에 대해 걱정만 쌓여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 분위기를 반전지키실 필요가 있음을 직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안드레, 세 사람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제자 중 나머지 9명은 산 아래 두고 가신 것입니다. 이 세 제자는 수제자 그룹으로 예수님은 그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고자 하셨고 그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초대교회 형성되었을 때 교회의 리더 역할을 했습니다. “높은 산”은 전승에 의하면 다볼산이라고 하는데 다볼산은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한참 남쪽으로 내려 가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신학자들은 대부분은 높은 산이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가까운 헬몬산이라고 주장합니다. 헬몬산은 해발 2814미터 높이이며 이스라엘 땅에서 유일하게 눈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수제자 그룹은 산꼭대기까지 올라간 것은 아니고 산 중턱의 사람들이 없는 은밀한 곳으로 올라가셨을 것입니다.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변형되셨습니다. “변형”이라는 단어는 원어로 “메타모포시스”이고 영어로는 metamorphosis로 생물학에서 곤충의 변태를 말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이는 정체성은 유지하면서 본질적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 아예 형태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변형되셔서 이전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전 모습은 초라하고 지치시고 피곤하신 모습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하게 사셨고 제대로 먹을 것조차 드시지 못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길 위의 예수님’이라는 칭호를 얻으셨습니다. 이사야 53:2-4은 예수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 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 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영화에 나오신 예수님은 한결같이 미남이고 키도 크시고 풍채가 좋은 모습으로 나오십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초라한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물론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에 대해 경외심이 약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예수님을 한쪽으로 모시고 가서 예수님께 그런 말씀 하지 말라고 책망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을 묘사한 구절에서 빛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디모데전서 6:16은 말합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났다는 말은 출애굽기 34:30을 떠올립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증거의 돌판을 들고 내려 올 때 그 얼굴에서 빛이 났는데 사람들이 이를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광채와 예수님의 빛은 다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반사한 것으로 달과 같이 빛난 것이고, 예수님의 영광의 빛은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해와 같이 빛났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낮의 해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듯이 예수님의 얼굴의 하나님의 광채는 너무도 찬란하여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입은 옷도 어찌나 빛이 나는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은 성육신하셔서 세상에 오시기 이전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영광스러운 모습의 발현입니다. 또한 이 모습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모습은 세 제자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이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상기하였습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벧후 1:16-17) 사도 요한도 인생말년에 밧모섬에서 유배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계 1:12-1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을까요? 이는 고난 후의 영광이 있음을 각인시켜 주고자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해 대속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으시지만 결국 부활하셔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라는 것이라는 소망을 심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소망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마음 속에 각인된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주로 사람들은 가시 면류관을 쓰신 에수님을 떠올립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얼굴을 축 늘어뜨리신 참혹한 모습의 십자가의 예수님에 대한 모습을 떠올립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만 붙들면 슬픈 신앙생활하기 쉽습니다. 나의 슬픈 처지가 십자가에서 고통 가운데에서 신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일치하면서 그나마 슬픈 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님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십자가와 함께 부활의 영광이 있어야 균형잡힌 신앙입니다. 우리는 부활과 재림의 예수님을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년 사순절 기간 동안 고난의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그러나 그 후 부활에 대해서는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예수님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사실 부활의 예수님이 깊이 각인되어 있어야 우리가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부활과 재림의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있을 때 고난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끝이 십자가와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으셨습니다(행 2:24).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영광의 예수님을 생각하고 붙들어야 합니다.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였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가리켜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셨습니다(22:40).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임을 말해 줍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한 것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고난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로 지금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고난의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2백만명의 백성을 이끌고 광야에서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는 변덕스러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느라 마음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부모는 자녀 한둘도 키우기 힘든데 그는 수많은 백성을 자식처럼 품고 온유와 겸손으로 섬김으로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엘리야도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아합 왕과 천하의 악녀인 이세벨의 박해 속에서 홀로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많은 애를 썼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마음을 여호와께 돌이키고자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갈멜 산에서 홀로 대결하기를 청했습니다(왕상 18:19). 그는 자기 죽을 각오를 하며 우상숭배자들에게 도전하여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은 주저하였고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엘리야의 목숨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육체와 정신이 모두 탈진하여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였습니다(왕상 19:4). 그는 영적으로 척박한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였고 영적으로 가장 부패한 아합 왕 때 선지자 활동을 하였기에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엘리야에게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하게 하셔서 그를 위로하셨습니다(왕하 2:11). 모세의 최후도 유대 전승에 따르면 승천했다는 설이 있고 그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모세 또한 많은 고난을 겪고 하나님의 영광 중에 거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은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은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출현은 앞으로 예수님에게 일어날 일의 예고편의 역할을 합니다. 누가복음 9:31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는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별세”라는 말은 원어로 “엑소더스(exodus)”로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떠올립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역사를 이루시고 약속의 땅인 하나님 나라에 이끌고 들어가실 것을 대화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4-8)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베드로는 영광스럽고 찬란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그는 천국이 따로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기 싫은 본심의 말을 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는 영광스러운 예수님과 그들이 평소 사모하던 모세와 엘리야가 같이 있는 산 위에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내려가기 싫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그들의 신앙생활의 목표가 달성된 것입니다. 그들의 꿈은 메시야와 함께 영광 가운데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문제 많은 무리들에게 시달리기 싫었습니다.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적대적인 종교지도자들과 부딪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고생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자고 제안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하지 않은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위한 초막도 짓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반응은 예수님의 기대하셨던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제자들이 영광의 소망 가운데 십자가의 길을 영접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십자가 도피의 반응이고 현실도피의 반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계획 대로 따르지 않음으로 예수님은 얼마 남지 않은 공생애 기간 동안 할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이 때 제자들의 엉뚱한 반응 때문에 성부 하나님이 친히 음성으로 나타나셔서 개입하셨습니다. “빛난 구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구름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셨고(출 34:5) 구름이 회막에 덮이면서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습니다(출 40:3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출 13:21; 40:36). 여호와의 영광의 구름은 솔로몬 성전에도 나타났습니다(왕상 8:10).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부 하나님께서 메시야의 대관식을 축하할 때 들려주셨던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대관식 때의 성부의 음성과 여기서의 성부의 음성의 의도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 때는 대관식에서 주어진 음성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메시야임을 확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대속제물로 드리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하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시는 자이시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고난을 통한 영광을 기뻐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하실 일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의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엿새 전에 말씀하셨던 십자가와 부활의 예언의 말씀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예수님이 가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현실을 도피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이 이 사실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변형되어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부께서 친히 임재하셔서 음성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임을 것을 반증합니다.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자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십자가를 회피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부담스럽고 고통스럽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고난 없이 영광으로 직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제자들은 성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엎드려 숨을 죽일 수 밖에 없습니다.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 때 예수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에 용기를 얻고 눈을 떠보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계셨습니다. 물론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꿈에서 깨어난 느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꿈은 보통 잊어 버리지만 이 사건은 그들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후에 이 세 제자들은 초대 교회의 리더가 되어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느라 숱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말씀을 전하면서 이 때의 일을을 떠올리면서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한 후에는 반드시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엘리야와 예수님의 죽음의 관계(9-13)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그들이 산에서 내려 올 때 예수님은 그가 다시 살아나기 전에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도록 경고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일어난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할 때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경계가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후 하신 경계(16:20)와 다른 점은 예수님의 부활 후라는 기한을 정해 주심으로 좀 더 구체화되었습니다. 9절을 달리 말하자면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적극 선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그런데 제자들은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와야 하리라”라는 구약의 예언을 언급한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크고 두려운 날”은 메시야가 오시는 날을 말하는 것으로 엘리야가 오면 메시야가 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방금 전에 예수님과 대화하고 계신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마음 가운데 “엘리야가 지금 온 건가?”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먼저 번에는 예수님이 오리라 한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라고 하셨고, 변화산 사건에서는 엘리야가 다시 등장하여 시점이 뒤죽박죽되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엘리야가 나타난 것이면 그 다음에 메시야가 나타나셔야 하는데 이미 예수님은 그 전에 오셔 제자들과 함게 있습니다. 즉 메시야가 먼저 오고 엘리야가 그 다음에 오게 되는 셈이 되는데 제자들은 혼란이 되어 질문을 한 것입니다.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예수님은 말라기의 예언대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이 맞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가 이미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잘 모르고 임의로 대우하였습니다. 임의로 대우하였다는 말은 NIV에서는 have done to him everything they wished로 ‘그들 마음대로 대했다’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죄를 지적함으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헤롯의 죄를 책망한 것으로 그의 미움을 사서 투옥되었고 결국 목 베임을 당하여 죽었습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이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세례 요한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그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한다고 했는데 세례 요한이 허망하게 죽자 그들의 기대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처음에는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병자를 고쳐 주시고 떡을 주실 때 사람들에게 구름 떼처럼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계속해서 주지 않자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습니다(요 6:66).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을 받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쳤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 당하시자 메시야가 아니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인생과 예수님의 생은은 같은 길을 갔습니다. 세례 요한이 죽임을 당하듯, 메시야도 그 길을 가십니다. 제자들은 이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로 제자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엘리야를 통해 자신의 죽으심이 당연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온통 십자가의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슨 얘기를 해도 십자가 없는 영광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씨름은 앞으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역사(14-20)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예수님과 세 제자가 변화산에서 내려 오자마자 무리들에게 이르렀습니다. 세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예상했던 대로 산 아래 문제 투성이였습니다. 그들은 내려오자마자 문제 많은 무리들과 맞닥뜨렸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꿇어 엎드리며 간구하였습니다. 그는 아들이 간질로 인해 심히 고생하였습니다. 그가 발작을 일으킬 때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졌습니다. 그가 발작을 일으키면 자기 통제 능력을 상실하고 위험한 곳에 뛰어 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습니다. 부모들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온 몸에 화상 자국과 넘어져 멍들고 상처난 자국 투성이였습니다. 이런 아들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입니다. 본문에 “간질”은 뇌의 이상으로 인해 정신을 잃고 발작하는 증세를 말하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성경의 질병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관점에서 보면 안됩니다. 과거에는 의학이 발달되어 있지 못하므로 병명이 세분화되어 있지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발작을 일으키면 다 “간질”로 여겼습니다. 성경은 이 아이의 문제의 원인은 귀신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의 발작은 귀신들린 현상 중 하나였습니다. 귀신은 그의 생명을 빼앗고자 그를 위험에 몰아넣었습니다. 이는 마치 치매 노인이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항상 부모님이 감시를 해야 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데려와 고치려 했으나 예수님의 제자들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과거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귀신을 쫓아냈던 경험을 살려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고자 했지만 연거푸 실패했습니다.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어 예수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가 예수님이 오시자 그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한 것입니다.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제자들의 무능력을 고자질하였습니다. 산 아래 있던 아홉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세 제자만 데리고 가신 것에 대해 못마땅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경쟁의식이 발동했는지 열심히 아버지의 아들을 고쳐주고자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능력은 다 어디로 가고 아이에게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예수님이 하셨던 대로 해보았습니다. 소리가 작아서 귀신이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소리를 더 크게 질렀지만 아이는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귀신들린 아이는 제자들을 조롱이라도 하는 듯 피식 웃었습니다. 아이 안에 역사하고 있는 귀신은 자기 능력을 과시하려는 듯 아이로 하여금 발작을 일으키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아이가 귀신들려 발작하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안타까우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무능력을 책망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대”라는 말을 사용하심으로 그 시대의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그 시대의 문제는 불신앙과 패역의 문제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실 때 믿음이 없다고 하지 않으시고 믿음이 작다고 말씀하셨습니다(6:30; 8:26; 14:31; 16:8; 17:20). 제자들은 아무리 부족하지만 믿음으로 예수님을 좇는 제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작고 연약한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자들이요 하나님의 선택하신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패역하다”는 말은 ‘근본이 삐뚤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삐뚤어진 마음으로 바라보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무리들은 삐뚤어진 종교 지도자들처럼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도 했으나 더 이상 이익이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이런 그들은 나중에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에 부하뇌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므로 마음이 딱딱하고 삐뚤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불신하는 세대들은 귀신 들린 아이처럼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귀신 들린 아이의 모습은 그 시대의 어른들의 불신앙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구김살 없이 해맑게 웃으며 건강하게 자라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아이들마저 어른들의 불신앙의 그늘에 있었으므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귀신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세상의 불행의 원인은 하나님을 떠난 불신에서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고 온갖 질병과 악령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를 진단하실 때 바로 믿음이 없음의 문제로 보셨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의 문제를 볼 때 영적인 관점에서 진단해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시각은 진단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라고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보면서 교육에 투자해야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높은 수준을 요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정의 문제라고 하면서 건전한 가정을 세우기 위해 상담과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접근법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종합적인 문제를 부분적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근본문제를 하나님을 떠난 불신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불신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사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하였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했고 벌거벗은 수치를 느꼈으며 서로에게 잘못을 돌리면서 남의 탓을 하고 비난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의 자녀들 중 가인은 동생을 죽인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의 후손 가운데 라멕은 사람을 죽인 것을 자기의 두 아내에게 자랑했습니다. 인간은 불신앙으로 인해 점점 타락해갔습니다. 여기에는 셋의 후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딸들에게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불신앙으로 인해 신성한 결혼을 타락시켰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영이 거할 수 없는 육체가 되어갔습니다. 노아 시대 당시 유명한 사람들은 육체의 힘을 자랑하는 네피림 족속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그들을 홍수로 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이어가셨지만 그들의 후손 가운데 사람의 죄와 불신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교만하여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불신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않으며 감사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그들은 당연히 악령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탄의 권세 밑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2:2을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은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그 공중 권세 잡은 자는 사탄으로 그들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입니다. 불신의 세대를 사는 사람들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풍성하신 사랑이 아니면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려 발작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서 불신 가운데 있는 세상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병들어 있는 이 아이의 모습의 불신과 패역의 세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이 아니면 고침받고 회복된 온전한 삶으로의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불신의 세상에 믿음을 심고 삐뚤어지고 병든 세상에 회복과 소망을 불어넣기 위해 오셨습니다. 변화산에서 영광의 모습 가운데 있던 예수님께서 다시 문제 많은 세상에 내려오셔서 병든 영혼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불신하고 패역한 시대 가운데에서도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메시야임을 믿고 나아왔습니다.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예수님은 이런 그의 믿음을 보시고 아이 안에 있는 귀신을 꾸짖어서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귀신이 나가자 그 아이는 멀쩡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강한 사탄의 세력을 내쫓으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이 불신과 패역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불순종 가운데에서 역사하는 영”의 다스림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죄와 율법의 정죄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죄의 결과인 사망의 그늘에 앉아 영적인 병이 들어 실음실음 앓다가 비참한 인생을 마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심판이 주는 두려움으로 인해 두려움의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간음한 여인처럼 빛 가운데 다니지 못하고 어둠 속을 방황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할 때 사망의 세계에서 옮겨 생명의 세계로 옮겨지게 됩니다.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제자들은 조용히 나아와 그들이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는지를 여쭈었습니다. 그들은 둘씩 전도여행을 하였을 때 귀신이 쫓겨 났는데 지금은 9명이 달라붙어도 안되니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능에 대해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 앞에서 당한 창피를 생각하면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원인을 알고 싶었습니다.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1 (없음)

예수님은 그들의 무능의 원인을 그들의 믿음이 작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작다’는 말에서 믿음은 크기가 있는 것으로 들립니다. “작은 믿음”이 있으면 “큰 믿음”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전도여행 때 귀신을 쫓아낸 것은 큰 믿음 때문이었고 지금은 작은 믿음 때문이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달리 말하면 큰 믿음에서 작은 믿음으로 쪼그라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볼 때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작다”라고 한 것은 믿음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질의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항상 현재형이고 가변적인 것입니다. 과거에 과거에 믿음이 있다고 해서 현재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과거에 믿음이 없다고 해서 현재 믿음으로 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작은 믿음”은 ‘작동하지 않는 믿음’이라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왜 제자들의 믿음이 실제 문제 앞에서 작동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이 전도여행을 갔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권능을 행하시는 것을 곁에서 많이 지켜 보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없이 전도여행을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운 마음에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나타내어 주시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형편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귀신을 쫓아낸 과거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옛날에 했던 대로 하면 능히 귀신을 쫓아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경험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방해가 되는 것이 과거의 자신이 이룬 업적에 기초한 자신감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큰 소리를 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자임을 절실히 깨닫는 자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며 하나님만을 간절히 의지하고 기도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믿음의 정의를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철저한 무능함에 깊은 인식과 더불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간절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더라도 하나님 한 분만을 간절히 의지하고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심으로 그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경험과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과거의 경험이 믿음이라는 통로에 방해가 되기 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 전쟁 시작하려고 할 때 여리고라는 성을 통과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리고성은 난공불락의 성으로 유명했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매일 엿새 동안 하루 한 바퀴씩 돌았습니다. 또한 일곱 째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그들이 여리고 성을 정복해야 하는데 여리고를 돌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해가 가지 않는 명령입니다. 그들이 성을 돌 때 성에서 화살을 비오듯 쏟아져서 죽을 수 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이 들었지만 하나님의 명령 대로 순종해서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그러자 철옹성 같던 여리고 성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를 점령한 경험이 아이 성을 공격할 때는 독이 되었습니다. 아이 성을 정탐하고 온 사람들은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도 능히 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대방을 얕잡아 보고 그들이 소수이니 모든 백성이 다 나가 싸울 필요가 없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패배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과거의 경험을 의지했고 아간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잘한 것 때문에 그것에 얽매여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되는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실패한 원인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장차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으신다고 했는데 메시야가 맞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을 죽으실 예수님께 의탁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의대상이 분명해야 믿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흔들렸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약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믿음보다 수제자 그룹들과의 경쟁심이 작용했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님께서 자기들은 제쳐두고 세 제자만 위하는 것에 대해 배가 아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고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어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고쳐달라고 했을 때 자기들이 고쳐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런 동기 자체가 믿음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한다고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다른 동기가 섞일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기 위해 일을 벌입니다. 또한 예수님도 믿지만 과거의 자기 경험을 섞어 자만감으로 어떤 일에 도전합니다. 게다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우리의 눈을 고정해야 하는데 이것이 흔들리면 믿음이 약해집니다. 

예수님 이런 그들에게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의 작은 믿음만 있어도 능히 산을 옮길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는 볼펜으로 점 하나 찍은 정도의 아주 작은 크기입니다. 눈이 나쁜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의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믿음은 크고 작은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은 겨자씨 한 알처럼 작더라도 순수하고 온전해야 합니다. 다른 것이 섞이면 안됩니다. 자기 경험이나 경쟁심의 동기가 섞이면 안됩니다. 또한 믿음은 자기로부터 출발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만 작동됩니다. 혹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흔들리면 믿음이 전혀 작동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 속에 숨은 죄가 있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거나 세상의 욕심과 인간적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께 대해 집중할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의 통로에 찌꺼기와 같습니다. 죄를 회개할 때 이 찌꺼기가 제거되고 우리의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라는 말을 통해 볼 때 믿음의 크기보다 믿음의 순수성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큰 믿음이 있어야 큰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큰 믿음을 갖고 있고 어떤 사람은 작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여 믿음의 크기를 측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믿음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농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겨자씨와 같이 작더라도 100% 순수할 때 작동합니다. 99.9% 믿음이 있고 0.1%의 불순물이 있어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의 원리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다만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0.1%의 자기의 공로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전적인 부패와 그리스도의 은혜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인식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실 때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자를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역사도 이런 원리가 작용합니다. 

산을 옮기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의미합니다. 산을 옮기는 일은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 영혼을 구원해 내는 일을 말합니다. 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전도하고 그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였다면 이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산을 옮기는 역사입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는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탈출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로 옮기는 역사입니다. 우리가 출애굽의 사건을 떠올리면 출애굽의 역사가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였던 10가지 재앙,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의 재앙을 면한 사건, 믿음으로 홍해가 갈라져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넌 사건들은 산을 옮기는 역사였습니다. 이 출애굽의 사건은 한 영혼의 구원을 얻는 사건의 모형입니다. 한 영혼이 바로와 같은 사탄의 권세에서 놓임받아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는 사탄의 수없는 방해와 유혹과 장애물을 뛰어넘는 과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역사가 있기에 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영혼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얻으면 하늘 나라에서 잔치가 벌어집니다. 구원의 축제가 벌어집니다. 제자들이 할 일은 겨자씨 한 알의 믿음으로 도전하여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산을 옮기는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예수님이 인류 구속 역사를 완성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제물이 되셔서 죽으셔야 합니다. 그 후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육신으로 계신 예수님이 없이 자립적으로 산을 옮기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과장되고 부풀려진 큰 믿음이 아니라 “겨자씨 한 알”의 순수하고 견고한 작은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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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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