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pring

성경 주석 종합, 성경 구절 묵상, 현대적 적용 주석


율법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누가복음 16:14-18)

누가복음 16장은 앞뒤로 불의한 청지기(16:1-8)와 부자와 나사로(16:19-31)의 두 개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비유가 아닌 연결고리가 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급진적 선언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비웃음으로 반응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그들의 마음을 지적하시고, 그후 율법과 복음의 연속성을 말씀하시면서 율법의 유효성을 천명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예로 이혼에 관해 말씀하심으로 더 엄격하게 율법을 적용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의 문제는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과 율법을 자기 편의적으로 적용하는 것과 연관시키시고 계십니다. 

비웃는 바리새인들

누가복음 16:14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바리새인들은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를 듣고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직전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13절). 즉, 하나님과 맘몬은 동시에 주인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배타적 선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 지식이 풍부하고 경건을 가장했지만, 실제로는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직격한 것에 대해 조롱으로 반응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방어적 태도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자기 탐욕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고 비웃음으로 자신의 탐욕을 가리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체했지만, 사실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금 돈주머니를 꽉 쥔 맘몬 신의 제단에 예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람은 오직 한 주인만을 섬길 수 있다는 예수님의 “배타적” 선언을 그들은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지만, 그들은 맘몬 사랑이 독생자를 보낸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 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종교의 진정한 역설 중 하나는 하나님께 가장 큰 원수가 되는 자들이 바로 가장 종교적인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종교적일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울 것이고 더 호의적이며, 하나님께서 더 인정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실은 정반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대원수는 거짓 종교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가장 큰 원수는 그의 진리를 거부하고 그 대신 다른 것을 대체하는 자들입니다. 지옥에서 가장 혹독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자들은 진리를 거부하고 거짓 종교를 받아들인 자들입니다. 그 거짓 종교는 바로 돈을 맘몬 신 숭배였습니다. 그들의 돈에 대한 사랑은 가히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가장 크게 경멸하셨습니다. 성전의 제사는 사두개인들이 운영했지만, 그들은 종교적 자유주의자들이었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강한 영향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권력 구조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전역의 회당에서 백성을 지도하던 자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교리와 생활방식은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되고, 믿어지고,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대적자들이자, 사탄의 도구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거짓 제자 가룟 유다와 같은 부류였습니다. 유다는 돈궤를 훔치기도 했고(요 12:4-6), 결국 은 삼십, 아이러니하게도 종의 값(출 21:32)에 그리스도를 팔아넘겼습니다(마 26:14-16). 유다는 예수님이 왕국을 세우실 것이고, 그 안에서 자신이 부유하고 지위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일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는 전형적으로 탐욕에 이끌린 사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도 그들은 기득권을 버리기 싫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그들은 돈을 사랑한 유다처럼 종교를 통해 자신을 위한 부를 얻으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경멸하는 이방인 빌라도에게 그를 석방하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하였고,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하였습니다(요 19:12). 그들은 탐욕 때문에 거짓말도 서슴없이 하였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들은 번영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부자가 아니더라도, 부자가 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한다면, 그는 돈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부의 크기가 아니라, 동기와 그것을 얻는 방식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돈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란 인간적으로 말해서 자기를 높이고 자신을 만족시키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돈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자아를 부풀립니다.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하심으로 돈을 어디에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6:21). 만일 교회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 부자가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말씀대로 사는 자는 부자가 되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됩니다(딤전 6:10). 바리새인들은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거부했고 예수님은 돈에 대해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그 말씀이 듣기 싫어 비웃음으로 자신의 본 모습을 가리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영혼을 많은 근심으로 찔렀고,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찔리실 때 그들은 그 일을 환호했습니다.

자기 의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

누가복음 16:15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겉으로 과시하는 종교를 행하던 바리새인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계십니다. 그들의 신앙은 거짓되고, 위선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을 바랐습니다. 그들의 자기 의로움은 그들의 마음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재물에 관한 교훈을 말할 때에도 조롱했는데, 그들의 근본적인 신앙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지적한 예수님의 도전을 어떻게 받아들였겠습니까? 

우리는 부유한 교인들을 자기들의 재물로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고자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이 아니라 “사람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겉모습을 가린 의로움이라는 얇은 가면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장면에서도 이들을 위선과 거짓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8).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였습니다. 그들은 헌금할 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단위가 작은 동전을 헌금함에 넣음으로 오래동안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도록 함으로 자기를 과시했습니다(막 12:41). 

성경은 분명하게 인간의 의의 한계를 선언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사람이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생각만큼 선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흔히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단순한 실수, 혹은 어쩔 수 없는 연약함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다릅니다. 죄는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우리가 돌부리에 걸린 것처럼 뜻밖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 결과입니다. 죄는 자유가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불법이며 반역입니다. 죄는 단순한 약함이 아닙니다. 연약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고의적으로 하나님 뜻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죄는 질병이 아닙니다. 죄는 치료받아야 할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의 단절이라 회개를 통해 죄 사함이라는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자기 의는 입법자이자 심판자라고 주장하며, 오직 주님께만 속한 권위를 주장합니다. 자기 의로 충만한 사람은 판단하는 태도를 갖고 그가 속한 곳에서 갈등의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들은 복음과 은혜의 세계를 부인하고 반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선포하는 동시에 인간의 죄성과 타락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가 있는 사람은 죄인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 구절에서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대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 위해 외적인 것에 신경을 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입니다(딤후 3:5). 그들의 종교적 행위가 의의 모양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의 동기와 생각과 의도를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의로운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이때 마음을 살피고 마음의 성결을 추구한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고전 4:5).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됩니다(히 4:12-13). 

예수님은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미움을 받는 것”은 헬라어 원어로 ‘브델뤼그마’로 ‘가증스러운 것’,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라고 하셨을 때 ‘가증한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가증스러운 것은 ‘공포와 혐오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의를 사람 앞에서 내세우기 위해 거짓과 위선의 가면을 쓰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의가 충만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을 최고 중의 최고의 사람으로 여겼지만 예수님은 정반대의 기준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행위는 사람들에게 ‘최고’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혐오를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인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과 복음의 연속성

누가복음 16:16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율법과 선지자들로부터 복음으로의 전환을 확증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는 헬라어 본문에 동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KJV, ESV, RSV는 were를 추가했고, 더 나아가 NASB95와 NIV는 were proclaimed(선포되었다)라는 말을 추가했고 NRSV는 were in effect(효력이 있었다)라고 추가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라는 구절은 예수님께서 율법이 폐지하셨다는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마 5:17). 사실 바로 다음 구절인 16: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는 구절은 예수님께서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바울도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롬 7:12). 

“요한까지”라는 말은 요한을 포함하는지, 요한의 시대가 구약의 마지막인지에 관해 혼돈을 줍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라는 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요한이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시대로의 전환점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라는 구절은 세례 요한의 출현 시기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사역은 구약과 신약의 ‘분할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구약이 세례 요한과 함께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구약과 요한의 사역 사이의 ‘끊김 없는 연결’이며, 이는 새 시대의 도래의 예고를 의미합니다. 

보통 세례 요한은 구약 시대, 즉 약속의 시대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자 요한의 사역으로 마무리되었다고 봅니다. 요한은 구약의 약속 시대의 마지막 대표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세례 요한은 신약의 성취 시대의 첫 번째 대표자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두 시대를 연결했습니다. 그는 메시아의 출현을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목격했습니다. 그의 독특한 지위와 메시아의 선구자라는 특권 때문에, 예수님은 요한을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7:26),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사역은 그가 메시아인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요한에서 예수님으로의 전환, 즉 구약의 약속 시대에서 신약의 성취 시대로의 전환이 완료되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요 3:30). 얼마 지나지 않아 요한은 투옥되어 참수형을 당했습니다(마 14:3-12). 그후 예수님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메시아의 사역을 지속하셨습니다(마 11:5). 

예수님의 오심으로 모든 선지자들의 소망이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율법(구약)을 폐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했다고 강조하셨습니다(마 5:17).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운 제도가 아니라 옛 제도의 정점이었습니다. 모세를 통해 역사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두 단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보이지 않는 내적 하나님의 나라이며, 예수님은 후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메시아, 즉 구원주로 영접한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의 미래 단계는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적 측면으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마음속에 임하는 보이지 않는 측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내면에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이들이 장차 미래에 그가 다시 오실 때 보이는 나라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을 염두해 두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심으로 새로운 시대와 사회 질서인 하나님 나라를 여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 그를 영접한 사람의 마음속에 임하고 인간의 행위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영적인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으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과 삶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제 전파되고 있으며, 이 메시지는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사람의 존재의 변화를 중시합니다. 이 메시지는 이제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축복이 아니라 개인과 하나님 안에서의 그의 영원한 잠재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요한 이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이 메시아의 선구자로 등장한 이후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전파하였습니다(마 3:2).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로 메시아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메시아가 오셨을 때,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 오셨고, 그분은 하나님 왕국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는 지난 2000년 동안 그분의 모든 제자들이 전해온 것과 동일한 메시지이며, 이 복음을 들은 우리는 왕이 다시 오셔서 이루실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기까지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은 자들입니다.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는 말씀에서 “침입하다”라는 동사는 헬라어로 ‘비아조’로 중간태인데 이는 ‘강하게 누르다’라는 뜻입니다. 이를 수동태로 한다면 ‘폭력을 당하다’를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1:12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로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맥락에서는 “천국은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문맥에 따라 해석하면 이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면서 수많은 축복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의 사역 초기부터 예수님의 삶의 현재 시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통치는 점점 더 많은 반대에 부딪혀 왔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헤롯에 의해 체포되었고,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점점 더 예수님을 반대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로마에 대항해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데에 사람들은 점점 더 불만을 품어가고 있었습니다. 

반면, 누가복음의 “침입하다”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1-13절)와 부자와 나사로 비유(19-31절) 사이에 있습니다. 그 중간(14-18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돈에 관한 가르침을 비웃자, 예수님은 그들의 돈을 좋아하는 것과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그후 율법과 선지자가 요한까지이고,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구약 시대에 메시아의 약속을 믿고 살았던 모든 믿는 자의 열망이 이루어진 것이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침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사람들이 열렬히 몰려들고 있다는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배척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그 나라로 들어가고자 밀치고 들어오는 모습을 표현하심으로 대조적으로 묘사하셨습니다. 심지어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백부장과 같은 이방인들이 온갖 장애물을 뚫고 그의 나라로 들어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배척한 세리와 죄인, 가난한 사람과 이방인들까지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려고 ‘밀치고 들어오는’ 열망을 표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침입”이라는 단어는 “폭력적일 정도로 간절하다”는 어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복음이 전해지고, 메시아의 나라와 그분의 인격, 직분, 은혜와 관련된 비밀들이 드러났습니다. 은혜의 나라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이고 영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 장차 오게 될 하늘나라의 영광이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보다 더 크고 분명하게 빛 가운데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알고 그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마 23:13). 그러나 사람들은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께로 몰려들었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사도들의 사역에 큰 무리로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큰 무리를 이루었고, 복음의 교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 서로를 밀치며 몰려왔고, 바리새인들이 던진 많은 어려움과 방해를 뚫고 나아갔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원했고, 큰 열심과 노력으로 그것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누가복음 16:17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이 말씀은 위치상 논리적 연결이 쉬워보이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불의의 재물에 대한 가르침과는 연결이 없어 보입니다. 어쩌면 여기서도 다른 곳처럼, 연결 고리 몇 개가 빠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선 비유에 대한 해석이 이미 충분한 연결을 제공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영원히 변치 않는 율법을 제멋대로 해석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해석이 율법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율법과 선지자에 반대되는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러 온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한 획도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율법 해석은 헛된 것이므로 사라질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율법은 세상 끝날까지 그의 백성에게 삶의 확실한 규범으로 남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획”은 헬라어 원어로 ‘케라이아’로 ‘뿔’, ‘돌기’, ‘획’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히브리어 문자의 정점에 있는 돌기 모양의 표시를 말하며 이는 히브리어 문자를 다른 문자와 구별하게 하는 점입니다. 이는 글자 획의 상단과 하단 끝에서 시작하여 비스듬히 뻗어 나온 짧은 선과 유사한 글자의 작은 연장선입니다. 이는 R의 하단에 있는 작은 획이  P와  구별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작은 “획”조차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구약의 모든 단어의 모든 글자가 중요하며 성취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랍비들은 모세의 기록된 율법에서 모든 작은 획과 가장 작은 글자를 보존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은 랍비들이 율법을 존중하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율법이 성취될 때까지 글자의 작은 점 하나라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절은 하늘과 땅이 없어지는 것이 오히려 쉽지, 율법의 한 점이 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강조한 것입니다. 천지는 세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변해갑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우리말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세상의 것은 다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시대마다 유행하는 것이 있고 도덕적 기준도 변합니다. 우리 사회의 질서를 가져다 주는 법도 매번 국회에서 수정합니다. 과거에는 불법적인 것이 현재는 합법이 되며 과거에는 합법적인 것이 현재는 불법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섭니다(사 40:8). 말씀의 불변성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됩니다. 말라기 3:6을 보면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시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씀도 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신실하시기에, 그의 약속과 율법, 복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과 구원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심판의 기준입니다. 그의 심판의 기준은 그를 영접하고 그의 말을 받느냐입니다(요 12:48). 말씀은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말씀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변치 않는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세상은 불확실하고 변하지만,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기에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신 다른 어떤 말씀도 성경이  문자적으로 무오합니다. 성경은 기록된 모든 단어 하나하나뿐 아니라 모든 글자와 모든 글자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하나님 자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6절에서 “눅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라고 하심으로 이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옛 시대, 곧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이 무효화된 것은 아니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말씀은 작은 부분 하나까지도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국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요 5:39).

예수님께서 세우신 새 질서는 율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시고 성취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마 5:17). 새 시대의 도래는 율법을 무력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의 목적과 의미를 충만하게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새 언약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하셨습니다(렘 31:33-24). 이는 율법이 더 이상 외적인 규정에 머무르지 않고 믿는 자의 마음에 새겨져 내면화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의 대속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롬 10:4).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새 영을 주셔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겔 36:26-27). 이 약속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의 본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혼에 대한 가르침

누가복음 16:18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대부분의 유대인 이혼 논쟁은 신명기 24장 1절에 나오는 “수치되는 일(something indecent)”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힐렐 학파는 이것을 넓게 해석하여, 아내가 음식을 태우거나 남편이 다른 여자를 더 매력적으로 여겼을 경우에도 이혼을 허락하였습니다. 이때 여자의 동의는 필요하지 않다고 명시했습니다. 반면, 샴마이 학파는 이것을 좁게 해석하여, 아내의 성적 부정행위가 있는 경우에만 이혼을 허락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라고 하심으로 유대인들이 이혼하는 목적이 다른 데 장가 들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자기 아내와의 언약관계를 버리고 더 매력적이고 근사한 여자와 결혼하기 위한 탐욕임을 지적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랍비 가말리엘의 할아버지 힐렐조차, 아내가 음식을 태우거나 심지어 국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는 경우에도 남편이 아내를 이혼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탈무드, Gittin 9:10 참조).

이혼과 관련한 구약의 가르침은 이혼을 제한적으로 허용하였습니다. 율법에서는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되는 일”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신 24:1-4). 당시 사회는 남성 중심이었고, 여인이 쫓겨나면 삶이 무너질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이혼 증서’를 써주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혼을 장려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이혼 풍습을 규제한 것입니다.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남편이 스스로 아내를 버린 경우를 말합니다.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는 새로운 남자, 즉 제 3자가 이미 남편에게 버림당한 여인과 결혼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의 경우 모두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짝 지어준 신성한 언약 관계입니다. 그런데 언약을 깨고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주권을 훼손하는 심각한 죄입니다. 말라기 2:16에서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미워하다”는 ‘가증히 여기다’는 뜻으로 매우 강한 뜻입니다. 이 단어는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해 쓰인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것은 우상 숭배하는 것과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과 아울러 언약 관계에 있는 아내를 버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13절에서 바리새인들의 물질에 대한 탐욕의 문제를 다루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여자에 대한 그들의 탐욕에 대해 다루십니다. 당시 랍비들의 결혼 관련 가르침은 매우 느슨했으며, 가정생활에서 불성실하였습니다. 그들은 헤롯 안디바와 그의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의 불법 결혼에 대해서도 오직 세례 요한만이 죄를 지적했을 뿐, 이스라엘의 어떤 랍비나 학자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팽배하던 느슨해진 결혼관에 대해 그들의 정욕을 지적하시면서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32과 19:9에서 예수님은 이혼의 예외 조항을 거론하셨습니다. 그것은 배우자가 성적 부정행위를 저지르고 언약관계를 깨뜨리는 경우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 배우자와 이혼하지 말 것을 권고했으나, 남편이 아내를 버리거나 믿지 않는 여자가 남편을 버릴 경우에는 이혼을 허용했습니다(고전 7:10-14). 그러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이같은 ‘예외 조항’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가와 누가가 이혼의 예외 조항을 거론하지 않고 다룬 것은 그 당시 랍비들의 느슨한 결혼관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수세기 동안 교회는 예수님의 이혼에 관한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려 애써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지나치게 엄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의 말씀의 도덕률이 실천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도에 관해 말씀하실 때에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9:57-62; 13:24; 14:25-35). 예수님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르도록 말씀하셨습니다(마 5:48). 만일 우리가 ‘값싼 은혜’의 관점에서 이혼에 관한 말씀을 본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가혹하고 ‘현대적 감각’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이런 문제에 대한 생각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16:15). 우리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결혼에 대한 태도를 자기 나름대로 자기 수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높은 수준에 맞춰 세우라는 것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혼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말 2:16). 

예수님은 이혼의 동기가 간음이라고 하신 것을 볼 때 대개 결혼 생활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은 간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만드신 제도입니다. 그런데 행복해야 할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부부 간의 갈등은 인간의 근본 죄 문제인 이기심에서 발전합니다. 바울은 남편에게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하라고 하였고 아내에게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남편과 아내가 모두에게 동시에 요구하는 권고입니다(엡 5:22-25). 바울은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엡 5:28). 이 말은 반대로 하면 아내를 미워하는 것은 곧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됩니다. 인간의 죄의 본성인 이기심을 제어하지 않으면 부부는 사소한 일에서도 갈등을 빚고 미워하게 됩니다. 이런 미움은 다른 배우자를 찾게 합니다. 그래서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혼은 한 몸이 된 것을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미 언약으로 한 몸이 되었는데 이혼으로 이를 나눌 때 극심한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는 누구의 양육을 받아야 할 것인지, 재산은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 이혼한 가정으로 인해 받는 자녀의 상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상상을 초월한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혼 문제에 대해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교회는 이혼 문제에 앞서 성경적인 결혼관을 가르쳐야 합니다. 결혼은 창조 때 세워진 하나님의 언약 관계이므로 결코 깨어져서는 안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마 19:9; 눅 16:18). 음행 이외에 이혼과 재혼은 간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죄악된 인간은 자기 죄로 인해 결혼 생활에 파탄에 이르게 합니다. 이에 교회는 결혼 보호와 화해를 우선 시 해야 합니다. 부부가 이혼에 이르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상담, 기도, 공동체의 중재를 통해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폭력, 학대, 심각한 음행, 불신자인 배우자로 인해 신앙 생활이 불가능 상황으로 불가피하게 이혼을 하게 될 경우 회개와 치유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재혼 문제는 단순히 법적 허용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과 신앙적 분별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이혼한 사람과 재혼한 사람에 대해 정죄하지 않고 그들의 상황을 듣고 이해하며, 회개와 새 출발을 돕는 목회적 배려를 해야 합니다. 다만 지도자 임직 문제에서는 더 엄격하고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딤전 3:2). 



댓글 남기기

About Me

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카테고리

Bible spring에서 더 알아보기

지금 구독하여 계속 읽고 전체 아카이브에 액세스하세요.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