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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누가복음 16:1-13)

예수님은 재물의 올바른 사용을 주제로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후 재물에 관한 올바른 가치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내용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은 비유이지만 비유의 특성상 우리는 예수님이 강조하신 주제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를 배우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청지기는 자기에게 닥칠 미래를 준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옳지 않은 청지기가 나름대로 지혜 있게 행한 것을 보고 칭찬하시며 “빛의 아들들”이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는 데에 있어 그 이상 지혜로워야 함을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청지기로서의 소명을 가지고 작은 것에 충성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심으로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고 영원한 미래에 우선권을 두고 살아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 청지기

누가복음 16:1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누가복음 16:1–31의 내용은 재물과 부의 올바른 사용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 장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16:1–8)로 시작하며, 여기에 재물과 관련한 가치관(16:9–13)과 바리새인들의 돈 사랑(16:14–15)에 관한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16:19–31)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 장 중간에는 율법에 관한 말씀(16:16–17)과 이혼에 관한 말씀(16:18)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장의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이 장의 대부분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입니다. 16:13(마 6:24), 16:16–17(마 11:12–13; 5:18), 16:18(막 10:11–12)만이 다른 복음서와 유사한 평행 구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16장은 15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15장은 청중이 바리새인인데, 16장은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로 시작하여 청중이 제자로 갑자기 바뀝니다. 또한 주제도 15장은 잃어버린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지만, 16장은 재물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가 상이합니다. 15장과 16장의 공통점은 모두 주로 비유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누가는 자료를 수집하면서 주제별로 이야기를 전개한 것 같습니다. 16장의 청중이 제자로 시작하는데 16:14에서 청중이 다시 바리새인으로 바뀝니다. 그후 19-31절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의 대상도 역시 바리새인입니다. 

1-13절의 비유를 흔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고 합니다. 이 내용은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한다면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원리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아주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원리를 이해하고 삶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이 비유는 다소 수수께끼 같은 말씀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옳지 않은(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가 자신의 부정직함을 칭찬했다고 말하지 않고, 그가 지혜롭게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8). 

복음서의 비유 중 약 3분의 1은 돈을 다룹니다. 돈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돈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는 깨어 있는 시간 중 돈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입니다. 돈을 모으는 방법, 돈을 쓰는 방법, 저축하는 방법, 투자하는 방법, 빌리는 방법, 세는 방법, 때로는 나누어주는 방법, 빌려주는 방법 등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생각하지 않는 시간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돈과 소유물, 부가 우리의 세상 경험에서 과도하게 차지하고 있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정의하고 어떤 결정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돈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돈에 관해서는 너무나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비유를 통해 돈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로잡으십니다.

1절은 ‘또한’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15장과 연결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5장의 주제는 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16장에서는 이와 다른 주제인 ‘돈’을 다루고 있습니다. 15장의 메시지는 ‘복음적’이며 자신이 잃어버린 존재라는 자아 인식을 절실히 깨달아야 하나님께 발견된다는 복음을 바리새인들에게 일깨워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로 말씀을 옮기십니다. 14절부터는 청중이 바리새인으로 바뀌지만,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상 제자들은 항상 동행했다는 점에서 이 메시지는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제자 훈련의 교훈에 가깝습니다. 비록 이 메시지는 매우 부유한 사람의 죽음과 운명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경고로 끝나지만(16:19-31), 분명히 이 메시지는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부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이 종종 정반대임을 보여주십니다. 진정으로 부자가 되고 싶다면 돈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이 장은 전체를 통해 우리는 잠시 멈춰서 돈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신중하게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습니다(사 55:9). 특히 돈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의 방식에 쉽게 물들기 때문에, 세상의 기만적인 부에 속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궁극적으로 죽음과 고통이라는 영원한 가난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을 통해 물질에 대한 영적인 가치관을 간직함으로 참된 부와 영광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실 때 비유를 통해 능숙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에 해당합니다. 8절을 보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청지기는 불의하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악하고, 사악하고, 교활합니다. 그는 무책임하게 일을 하더니 결국 횡령범이 되고 맙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와 “지혜 있게” 일하여 “칭찬”을 받은 것은 서로 맞지 않습니다. 이 청지기를 칭찬한 주인인 하나님은 불의한 것이 되니 이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보게 하고 이 청지기를 선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이야기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예수님께서 지어내신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비유의 내용의 그 이상의 비밀스러운 설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거나 단순화할 숨겨진 세부 사항도 없기 때문에 이 비유에서 단순하게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신 진리의 포인트를 정확하게 알고 배우면 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옳지 않은 청지기가 잘했다는 칭찬하시는 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가르치시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종종 랍비의 가르침 방식을 따르셨고, 랍비들은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방식은 “하물며”라는 짧은 구절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청지기가 지혜롭게 하였으니 예수님의 제자는 더욱더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방식입니다. 18장에는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간청을 결국 받아들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과 비교하시면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는 메시지를 주십니다(18:7). 즉 불의한 재판관이라는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이라는 ‘큰 것’으로 발전해 나가는 방식입니다. 랍비들은 그렇게 가르치기를 좋아했고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우리는 16장의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에서 “하물며 얼마나 더,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라는 방식의 메시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청지기”의 헬라어는 오이코노모스(oikonomos)로,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s)와 ‘다스리다, 관리하다, 몫을 나누어주다’를 뜻하는 네모(nemo)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청지기는 주인의 집, 노예, 재산 등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을 가리킵니다(눅 12:42; 갈 4:2). 청지기는 보통 높은 지위의 관리나 부유한 집에서 주인의 가사를 전담하던 집사격 인물이었습니다(창 43:16). 특히 종들 가운데 우두머리로서 하인들을 감독하고, 주인의 자산을 관리했으며(창 39:4; 롬 16:23), 때로는 주인의 상속자인 자녀를 돌보고 교육하는 역할까지 담당했습니다. 또한 다른 하인이나 일꾼들에게 양식이나 품삯을 나누어주는 권한도 있었습니다(마 20:8; 24:45; 눅 12:42).

즉, 청지기는 단순한 심부름꾼이 아니라 주인의 가정과 재산, 심지어 사람까지 관리하는 전권대리인이었습니다. 청지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을 충실히 섬기는 것입니다( 고전 4:2 ). 청지기는 주변의 재물을 볼 때, 그것들이 주인 개인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소유임을 기억해야 하며, 주인을 기쁘시게 하고 유익하게 하는 방식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절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횡령하고, 잘못 사용했으며, 부주의로 인해 재산을 잃거나 손상시켰습니다. 이 소식이 주인에게 들렸습니다. 본문에서 “주인에게 들린지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디아발로’로 ‘고발하다’는 뜻입니다. NIV에서는 whose manager was accused로 ‘그 청지기가 고발되었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는 모든 인류가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진 것의 청지기 로 표현되는 반면,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할 뿐이며, 그것도 위대하신 주님의 지시에 따라,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뿐입니다. … 우리 모두는 ( 주인이 청지기에게 한 것처럼) 같은 비난을 받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마땅히 개선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목적을 왜곡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께 심판받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심판 해야 합니다 .

이 청지기는 자신이 주인의 재산을 맡은 청지기라는 사실을 잊고, 마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함부로 사용하며 ‘탕자’처럼 낭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은 즉시 재산 목록과 장부를 제출하도록 명령했고, 그를 해고했습니다. 본문은 이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낭비하다”라는 표현은 헬라어 디아스코르피조(diaskorpizō)로, ‘뿌리다’, ‘흩다’, ‘낭비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누가복음 15:13에서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써버린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15:13). 이 단어는 마치 곡식 알갱이를 바람에 날려 겨와 분리하는 키질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로 볼 때, 이 사기꾼 같은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을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절제하게 다루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인의 소유를 신중하고 지혜롭게 관리해야 한다는 청지기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를 완전히 저버렸으며, 이는 충성스러운 청지기의 모습과 정반대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이며, 언젠가는 그 소유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분께 보고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0에서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라고 썼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한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게 될 것입니다(롬 14:12). “직고”라는 말은 장부를 결산해 보고하는 회계용어입니다. 우리는 청지기가 주인에게 회계 보고를 하듯,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보고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가 신실한 청지기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후하게 상을 주실 것이며, 그 상은 영원히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각자가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의 삶에 대해 보고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맡기신 시간, 재능, 재물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이 직고의 날에,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혹은 낭비했는지를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을 하늘로 ‘가지고 갈’ 수는 없지만, 하늘로 미리 보낼 수는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두 번이나 말씀합니다(계 7:17; 21:4). 이것은 단지 이 세상에서 고생한 슬픔의 눈물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음을 깨달을 때 흘리는 후회의 눈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고(요 15:5),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며(엡 5:18),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면 우리는 놀라운 열매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주신 세월을 아껴 이 짧고 귀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실 것입니다(엡 3:20).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시고 얼마나 이익을 남겼는지 후에 반드시 “결산”하십니다(마 18:24; 25:19; 히 4:13). 이 말씀은 죄인이든 구원받은 성도든 모든 사람이 듣게 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탕자와 형에 대한 묘사에서 두 가지 상반된 삶의 철학을 묘사하셨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허비했지만, 그의 형은 충실한 일꾼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접근 방식은 타인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삶을 투자 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은 바로 그 진리를 강조합니다. 삶은 청지기 직분이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충실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주님께 보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 재물의 올바른 사용과 그릇된 사용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15장에서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허비’하며 방탕하게 살았습니다(15:13). 맏아들은 집에 남아 성실히 일했지만, 동생의 회복을 기뻐하지 못한 채 마음이 완악했습니다(15:29–30). 놀랍게도, 이 두 태도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회개하기 전 탕자의 삶을 결코 두둔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낭비를 피하거나 성실만을 추구하는 것에 머무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16:1–8)를 시작으로, 재물의 올바른 사용과 잘못된 사용에 관한 교훈(16:9–13)을 주십니다. 여기서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신중하고 지혜롭게 관리해야 할 책임을 맡았으나, 오히려 주인의 재산을 탕진한 인물입니다. 이는 15장에서 탕자가 한 행동과 동일한 단어로 연결됩니다. 반면 맏아들은 성실히 일했지만 그의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그의 삶을 16장의 관점에서 본다면 맏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 재능, 재물을 하나님의 영광과 뜻에 맞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는 잘못된 삶을 살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로서 재물과 기회를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회계 감사를 실시한 주인

누가복음 16:2

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주인은 누군가가 고발한 건에 대해 추궁을 합니다. “이 말이 어찌 됨이냐?” 이 질문에는 주인의 분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당시 중동 문화에서는 주인과 청지기 관계가 절대적인 신뢰를 전제로 하는데, 이런 질문은 단순 조사라기보다 신뢰 붕괴의 선언에 가깝습니다. 본문의 흐름상, 주인은 증거 조사를 길게 하지 않고, 곧바로 정산 명령과 해임으로 이어갑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잠시 죄를 숨길 수 있지만, 결국에는 드러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주인은 다른 사람의 고소의 말을 듣고 당장 그를 해고하지 않고 그 증거가 되는 장부를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과 하인들을 관리하며, 수입과 지출을 장부에 기록했습니다. 주인이 “셈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회계 감사를 실시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명령은 보통 해임 직전에 내려졌습니다. 즉, 더 이상 신뢰가 없다는 신호입니다. 이 명령은 주인의 명령은 청지기에게 “네 직분이 곧 끝난다”는 통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재산 결산이 아니라 직분 종료와 책임 추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사회적 관계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위임받은 대로 이를 청지기처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셈하라”는 말씀은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삶의 사용 내역을 보고해야 함을 뜻합니다(롬 14:12). 우리는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항상 누릴 수 없습니다. 죽음이 오고, 우리를 청지기 직분을 다할 때가 옵니다. 우리는 그때 우리 주님께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주의 백성에게는 그가 행한 대로 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하실 것입니다(마 25:21,23). 그러나 이 청지기와 같이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 자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마 25:30). 

주인은 회계보고서를 본 후 선언합니다. “이제부터는 청지기 노릇을 못하리라”. 이 선언은 이스라엘 지도자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불충실과 무책임에 대해 영적 청지기로서의 해고를 선언한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로암미’, 즉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라고 함으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심판을 선언했습니다(마 3:10). 이는 청지기 비유에서 “이제부터 청지기 노릇을 못하리라”는 선언과 유사합니다. 즉, 불충실한 종은 그 직무에서 배제되고, 책임을 지게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도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라고 하심으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청지기 직분을 박탈당하고 참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들, 즉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자들이 이어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21:43).

해임 이후를 대비하고자 한 청지기

누가복음 16:3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2절에서 주인은 청지기에게 해고를 통보했지만, 3-7절을 보면 청지기가 장부를 정리하고 회계 보고를 위한 시간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는 명령에 의거한 것입니다. 그는 회계 보고 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라고 생각하며 고민했습니다. 그는 하인처럼 노동일을 할 만큼 힘이 없었습니다. 청지기는 그동안 종들에게 이것저것 하라고 지시만 했을 뿐 자기가 직접 노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는 말은 NIV에서는 I’m not strong enough to dig으로 ‘나는 땅을 팔 수 있는 힘이 없다’라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땅을 판다”는 말은 땅을 비옥하게 하고 경작하는 농사일을 말합니다. 그는 실제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비천하고 고된 삶의 방식에 굴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 가운데서 가장 천한 일이 바로 농사였기 때문입니다. 탈무드 전승에서도 농사일을 “천한 직업 중 하나”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노동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는데 그것은 ‘빌어 먹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하자니 부끄럽다고 하였습니다. 비정경이고 고대부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혜서인 시라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자식아, 거지처럼 살지 마라. 구걸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음식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한다면, 당신은 진정으로 당신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음식을 받음으로써 당신은 스스로를 더럽힌다. 구걸은 예민한 사람의 영혼에 고문이다. 뻔뻔스러운 사람은 구걸을 달콤하게 들리게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울화통이 터지고 있다”(시라서 46:28-30). 고대 세계에서 구걸은 유일한 복지 수단이었습니다.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약자라면 구걸이 정당하지만, 건장한 사람이 구걸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궁핍이 구걸보다 낫다. 세상에는 쓴맛을 내는 것이 많이 있지만, 구걸보다 더 쓴 것은 없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청지기는 밭을 갈아 농사를 지을 정도로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비천하고 고된 삶을 살고 싶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육체노동을 기피하는 사람은 게으른 죄의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으른 자는 “사자가 길에 있다, 사자가 거리 가운데 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 위험하지 않는데 자기 합리화를 위한 과장된 변명을 합니다(잠 26:13) 그들은 수고보다는 편안함, 노력보다는 당장의 즐거움을 선택합니다(잠 21:25).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짐이 되기 때문에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라고 말했습니다(살후 3:10). 하나님은 사람이 일하고 수고로 열매를 얻기를 기뻐하십니다. 전도서 기자가 말한 것과 같이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전 2:24). 

누가복음 16:4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청지기는 그의 직분을 수행하는 데에는 게을렀지만 이익을 챙기는 면에서는 재빠르고 수완이 좋았습니다. 그는 갑자기 영감이 번뜩 떠올랐습니다. 그는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 그가 살아야 할 곳과 일정한 수입과 직업을 확보할 수 있는 정보를 찾았습니다. 그는 의를 추구하는 길보다 즉시 이익이 되는 결과를 약속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내가 …알았도다”라는 말에서 ‘알다’는 ‘기노스코’로 감각적 지각을 의미합니다. 그는 충분히 생각해서 결정한 것이 아니고 자기 이익에 따라 돌발적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는 불의한 청지기가 재물을 불의하게 다루는 데 능숙함을 말해 줍니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해고당한 후에 자기를 영접해 줄 사람을 찾아갈 계획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해고당한 후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해고를 당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고 올바른 삶의 길을 갈 것을 결심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것에 충실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 불성실할 때 그에 따는 결과는 직분 상실이라는 비참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정직과 충실함의 길은 단지 옳은 길일 뿐만 아니라 위로와 평안과 안전의 길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나마 자기가 살 길을 모색합니다. 그는 아직 해고당하기 전이기 때문에 그가 가진 직책을 활용하여 미래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그는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자기 직분을 이용하여 주인에게 손해를 끼칠 계약을 하고자 합니다.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에게 빚을 깍아 주는 호의를 베풀어 그들로부터 도움을 얻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죄가 또 다른 죄를 이끌며, 불성실의 한 행동은 기회만 있으면 많은 다른 나쁜 행동들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들은 자연스럽게 더 많은 다른 죄를 짓게 합니다. 하나의 거짓말은 그것을 진실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더 많은 거짓말을 요구하며, 하나의 속임수는 발각을 피하기 위해 더 많은 속임수를 요구합니다. 죄의 시작은 댐이 터지는 것과 같아서 한 죄에 빠지면 그것이 어디서 끝날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나 진리보다 ‘자기 자신’에 더 신경을 씁니다. 만일 이런 사람이 구원을 찾는다면 이는 이기적인 목적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세에서 편안한 ‘거처’를 원하기 때문에 구원을 구할 것입니다. 

채무자의 빚을 감면해준 청지기

누가복음 16:5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일일이 불렀습니다. 그는 빚진 자에게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금액을 낮추어 주고자 했습니다. 이는 그가 해고되기 전에 주인의 재산을 훔치는 행위입니다. 임대료는 종종 집주인에게 현금이 아닌 현물로 지불되었습니다. 이는 두 가지 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첫째로, 채무자들이 청지기에게 고마워할 것입니다. 둘째로,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은 채무자들을 끌어들여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그는 이제 현명한 협박을 할 수 있는 강력한 위치에 설 수 있습니다. 유대 문화권에서는 동족에게 돈을 꾸어 줄 때 이자를 부과하는 것이 불법이었습니다(출 22:25; 레 25:36; 신 23:19). 그래서 교묘하게 이자를 대출금에 숨겨 원금에 이자가 포함되도록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수익성이 좋은 상품에 100%에 달하는 이자를 부과하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인 사업 관행에 따르면, 청지기는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고리대금 대출을 했습니다. 

고대에는 사람들이 굶주림이나 손실을 피하기 위해 돈을 빌리기는 했지만, 상업적인 목적으로 돈을 빌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돈을 빌려줄 때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들어서면서 로마의 영향으로 채무자들에게 높은 이자를 부과하는 관습이 생겼고, 그 결과 채무자들은 더욱 가혹한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마 5:25-26; 18:34).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들과 접촉하면서 돈을 꾸어주는 일은 점점 더 상업적으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일시적으로 빚을 져야 했던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라는 모세 율법의 정신은 완전히 무시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압제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6:6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청지기와 만난 한 채무자는 “기름 백 말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청지기는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라고 재촉했습니다. 여기서 “증서”는 오늘날 임대차 계약서에 해당하는 것으로 지대를 명시한 계약서나 해마다 생산물의 몫을 정해진 대로 납부했다는 확인서일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청지기는 여전히 빚을 관리하고 있지만, 짧은 기간 동안만 관리할 것이므로 채무자에게 재빨리 행동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청지기는 아직 시간과 권한이 있는 동안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영혼을 구원하고 보물을 쌓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남은 시간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영적으로 졸고 있는 성도들에게 역설적으로 큰 교훈을 줍니다. 

여기서 기름은 헬라어로 ‘엘라이온’으로 올리브 기름을 말합니다. 이 기름은 단맛이 나는 기름으로 식용에 많이 사용되었고(출 29:2),  그 외에 등불에 많이 사용되었고, 도한 기름 부음에 사용되었습니다(출 29:7; 레 8:2; 21:12). 

1말은 약 30리터 조금 넘는 양으로 큰 빚입니다. 그러므로 기름 100말은 약 3000리터의 기름으로 올리브 기름이라고 하면 1000데나리온에 해당하며, 이는 일용직 노동자의 3년 치 임금보다 더 많은 금액입니다. 은행 대출 부서에 불려가서 새 차 대출금을 절반으로 깎아준다고 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희소식일까요? 

청지기는 주인에게 지불해야 할 금액을 줄임으로써, 그는 주인에게 상당한 손실을 초래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보답은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면, 호의를 받은 사람은 후에 호의를 준 자에게 호의를 베풀 의무가 있었습니다. 빚을 진 자는 빚을 갚느라 큰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청지기가 한 일은 빚을 갚은 방법을 변경한 것이 아니라 빚진 금액을 줄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100말 빚진 것을 50말로 줄여 주었습니다. 이 청지기는 자기가 가진 권한을 최대한 이용하여 빚진 자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이는 주인에게 손해를 끼친 악한 짓이었지만 빚진 자에게는 좋은 일을 베푸는 행위였습니다. 

누가복음 16:7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청지기는 다른 이에게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100석을 빚졌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청지기는 증서를 가지고 오도록 하고 80석으로 줄여주었습니다. 여기서 “석”은 ‘고르’라는 도량형 단위로 ‘호멜’과 같으며 밀가루, 곡물 및 기름의 측정 값으로 사용됐습니다(왕상 4:22, 대하 2:10; 스 7:22). 에스겔 선지자에 따르면 고르는 10밧(바트)과 같습니다(겔 45:14). 1밧은 22-23리터 정도 하므로, 1고르는 220-230리터에 해당합니다. 무게로 환산하면 1리터에 약 0.77kg 정도하므로 1고르는 170kg입니다. 현대 가치로 170kg의 밀은 약 5-6가마니(40kg 기준)입니다. 

주인의 칭찬

누가복음 16:8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8절은 ‘나쁜 사람의 좋은 본보기’를 보여줍니다. 그 주인은 불의하고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지혜롭게 행하였기 때문에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비유에서 예수님이 옳지 않은 청지기를 칭찬한 것이 아니라 비유 속의 주인이라는 점입니다. 분명히 주인은 청지기가 채무자들로부터 받을 자기 수입을 줄인 것을 잘했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인은 청지기가 자기 소유를 낭비한 것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통찰력과 예견을 가지고 지혜롭게 행동한 것은 칭찬했습다. 주인은 그의 방법이 아니라 그의 통찰을 칭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청지기가 불의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신자들이 이 사람의 불의한 행위를 따르라고 제안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옳지 않은 청지기는 자기 미래에 ‘투자’하였습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장차 필요할 것을 대비하기 위해 현재의 기회를 사용함으로써 지혜를 보였습니다. 만일 내가 앞으로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들었다면, 혹은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임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의 우선순위에 어떤 영향을 줄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선할 뿐 아니라 영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라고 말씀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청지기의 부정을 칭찬하신다는 암시는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직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또한 똑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지에 가치를 두신 적이 결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십니다(롬 16:19). 우리는 돈을 사용할 때 지혜로워야 합니다.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청지기와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물질적 자원이 확실히 끝나는 때를 맞이할 것입니다. 기껏해야 몇 년 안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데, 그때는 재물도, 돈도, 칭호도, 영향력도 없습니다. 다 남겨두고 갈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지고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친구들입니다. 

주님의 비유는 누가복음 16장 8절 중간에서 끝이 나고, 그 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삶에 적용할 영적인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곧 잃어버린 자들, 즉 현세만을 위해 살고 영원을 위해 살지 않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8절 후반부는 헬라어 접속사 ‘호티’(왜냐하면)로 시작하는데, 이는 앞의 진술을 설명하거나 이유를 밝히는 구실을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더 지혜롭다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의 지혜는 오직 자기 세대 안에서만 국한된 것입니다. 그들은 눈앞의 시간적이고 일시적인 것들은 잘 보고 잘 활용하지만, 영원한 것들은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의 가치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순간적인 이익을 위해 열심히 애쓰는 것 이상으로, 신자들은 영원을 준비하는 삶 속에서 기회를 더 지혜롭게 활용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영향력과 재물을 오직 자기 이익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그들은 미래에 더 나은 처지를 얻고자 치밀하게 계산하고, 지금 가진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이것은 신자들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할 것은 그들의 이기적인 목적이 아니라, 현재의 기회를 사용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태도입니다. 다만 신자들은 이 땅에서의 잠깐의 미래가 아니라, 다가올 영원한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씀합니다. 곧 우리의 은사와 재능, 물질적 축복조차도 모두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어진 것들을 장차 올 날에 회계할 때를 생각하며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12:31).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며, 그의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 세상의 소유를 붙잡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소유를 구제에 사용하고, 하늘에 낡아지지 않는 보물을 쌓아야 합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12:34)는 말씀처럼,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와 달리 “빛의 아들들”인 성도들은 단지 이 땅의 미래가 아니라 영원의 가치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우리가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음을 분명히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는 그 은혜 속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덧없는 세상에서의 잠시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도 그렇게 영리하고 치밀한데, 성도들은 정작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는 데에 있어 그 이상 지혜로워야 합니다.  

비유를 통해 주신 교훈

누가복음 16:9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예수님은 옳지 않은 청지기가 나름대로 지혜 있게 행한 것을 보고 칭찬하시며 “빛의 아들들”이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는 데에 있어 그 이상 지혜로워야 함을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제자들로(16:1), “빛의 아들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구절을 문맥에서 끊어 읽는다면, 우리는 돈으로 친구, 즉 이른바 “좋을 때만 친구”를 살 수 있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맥락 가운데 읽으면, 예수님은 돈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돈을 사용하여 친구를 사귀라고 격려하십니다. 그 맥락은 이것이 단순한 “지상적인 친구”가 아니라, “하늘의 친구들”임을 말합니다. 곧 그 친구들은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할” 친구들입니다. 너희의 돈을 사용하여, 장차 영원한 집으로 너희를 맞아줄 친구들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돈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자주 잘못 사용되어 악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아야 합니다. 그 이상 욕심을 내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고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 돈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르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딤전 6:8–10). 만일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은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입니다(딤전 6:17–19). 

예수님은 재물을 어디에 사용해야 할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의 다스림을 받고 이 명령에 순종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늘에서 친구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퇴를 위해 적립금을 쌓지만 안타깝게도 하늘 나라의 영원한 은퇴 플랜을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있는 곳이 곧 우리가 돈을 넣는 ‘은행’입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맞아줄 무수한 친구를 만드는 한 방법은, 모든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확신하고 신실하게 복음을 증언함으로 그들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침으로 친구를 사귄다면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갈 때 하늘에 있는 복음의 동지들이 우리를 환영할 것입니다. 또한 내가 복음을 전함으로 사귄 친구들과 기쁨의 조우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가르친 제자들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바울은 그의 기쁨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자신이 섬긴 성도들, 곧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주님 앞에서 다시 보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쁨은, 구주 앞에 설 때 그들과 함께 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한 충성

누가복음 16:10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이 구절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속담과 같습니다.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더 큰 책임을 맡을 때도 충실할 경향이 있습니다. 작은 일에 무책임한 사람은 더 큰 일에도 무책임할 것입니다. 작은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낸 사람은 큰 일을 맡는다고 해도 그 충성스러움은 변함이 없습니다. 

1-9절의 비유에서 주님은 지혜로움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10-13절에서는 충성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우리의 성품은 충성심이고 이 충성심은 다른 사람에게도 신뢰감을 줍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나 우리가 약속한 일을 훌륭하게 해낼 것이라고 믿을 때 어떤 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리더의 자질을 인정받아 세상에서 승진할 것입니다. 

신실함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히 감당하는 태도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어떤 사명을 맡게 될지를 결정짓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신실하게 사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는 돈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돈이 우리의 선택과 결정을 지배하며, 우리를 부패와 타협으로 이끌고, 주님을 향한 헌신을 서서히 식게 만든다면, 결국 돈이 우리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에게 신실하며 정직한 사람은 가진 것이 많든 적든 하나님이 물질을 다루는 데 충실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적으면 살아가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율에 따라 헌금을 하겠다고 하는데 이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돈이 적을 때는 생계비가 모자란다고 핑계하고 돈이 많을 때는 투자할 데가 많아 힘들다고 핑계합니다. 우리는 돈을 벌기 전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원칙을 견지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용돈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을 실천할 때 나중에 수억 원을 벌 때도 십일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일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마음으로 할 때 그것은 지극히 중요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상황이 한 사람의 신실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신실함을 결정합니다. 사람들이 “더 많이 가졌다면 더 많이 줬을 텐데”라고 말하는데,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과부는 자기가 가진 모든 생활비를 드렸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헌금한답시고 자기를 자랑하였습니다(눅 21:1-4). 큰 일을 맡았다고 충성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 일을 맡아도 충성됩니다. 

본문에서 “지극히 작은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재물을 가리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크고 귀한 가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재물에 충실하다는 것은 그것을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 곧 청지기로서 관리해야 할 것임을 인정하고, 언젠가 그 청지기직에 대해 반드시 회계할 날이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특별히 제자들에게 주어진 경고였습니다. 가난한 출신이 많았던 그들은 자신들이 재물을 섬길 위험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마도 배반자 유다를 염두에 두시며, 돈에 대한 사랑은 크든 작든 어디서든 드러날 수 있고, 작은 일에서의 불의 또한 큰 일에서의 불의와 다르지 않게 인격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많은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어질 더 큰 영적 재물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을 뜻한다기보다, 작은 일과 큰 일이 같은 원리 아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선언된 원리가 더 넓은 차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1-9절의 비유는 참으로 독특합니다. 주님께서는 주인의 재산을 부정하게 다룬 청지기의 교활한 행동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본보기로 제시하셨습니다. 주님은 악한 것 속에서도 배울 만한 선한 교훈을 끌어내시는 분이십니다.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가 그렇고, 신약성경이 전쟁이나 노예제도와 같은 본래 사악한 것들을 고상하고 하늘의 진리를 설명하는 예로 삼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청지기의 불성실한 태도는 결코 하나님의 청지기들에게 본이 될 수 없음을 내비치셨습니다(13).  

본문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낮은 차원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 높은 차원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적인 것에서는 풍족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관하여서는 심히 가난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습니다(잠 13:7). 더 나아가, 낮은 차원의 소유물을 가장 고귀하게 사용하는 길은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인데, 이로써 우리 인생은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를 통해 인생의 의미와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의 진정한 목적을 가르치십니다. 

누가복음 16:11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예수님은 “불의한 재물”을 충성스럽게 다루지 못한다면 “참된 재물”을 맡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불의한 재물”은 KJV에서는 the unrighteous mammon(불의한 맘몬)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마모나스’로 ‘재산’, ‘돈’, ‘소유’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돈이라고 하지 않고, “불의한 재물”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돈을 ‘불의하다’라고 표현한 것은 재물을 얻는 과정에서 불의가 개입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것이지만, 인간은 탐욕 때문에 불공정한 거래, 착취, 거짓, 불법 등을 통해 쉽게 돈을 얻음으로 그 재물은 “불의한 것”이 됩니다. 재물은 중립적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거나, 하나님과 이웃을 무시한 채 낭비하면 불의한 것이 됩니다. 반면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적절히 사용한다면 그 재물은 의로운 재물이 됩니다. 재물은 사람에게 삶의 안정과 행복과 성공을 보장할 것처럼 우리를 속입니다. 그러나 재물은 실제로 죽음 앞에서 아무 힘이 없으며 재물로 인해 걱정하거나 불안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재물은 ‘거짓’되고 ‘신뢰’할 수 없으므로 불의합니다. 재물은 영원히 내 것이 될 수 없고 죽음과 함께 반드시 사라집니다. 

11절은 10절의 다른 방식의 표현입니다. 11절은 10절에 이어 충성심과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은 세상적인 돈과 소유물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만일 불의의 재물을 다루는 데 청지기적 사명을 가지고 충성하지 않으면, 영적인 일, 즉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나라의 일을 맡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돈에 대해 갖는 관점과 그것에 충성하는 일은 영원한 보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영혼 돌봄, 선교, 전도, 교회 감독과 같은 참된 영적 부를 맡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와 청지기 직분을 허비하고 낭비했다면 하나님께서 영원한 상을 주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돈으로 장신구, 안락한 생활, 세상의 소유물, 곧 얄팍하고 부패하며 불타 없어질 모든 일시적인 것들을 스스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의 것에 얽매인다면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참된 것”, 즉 진정한 부의 영원한 상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세속적인 재물의 소유가 아니라 그 재물의 사용입니다. 세속적인 재물은 그 자체로는 중립적입니다. 다음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부유했기 때문에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물을 하나님과 이웃 나사로를 사랑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부를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신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의의 부를 상당 부분 맡기셨습니다. ‘참된 것을 맡기다’는 말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부이고 영원히 지속되는 부입니다. ‘세상의 부’는 기껏해야 평생 동안만 지속됩니다. 심지어 이 세상에서도 죽기 전에 고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맡은 재물을 통해 누군가가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데 쓰임받을 때, 훗날 천국의 문에서 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이들이 우리를 맞아들이는 영광스러운 순간이 올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사용한 재물이 가져온 구원의 열매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재물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함으로 충실히 관리한다면 하나님은 그의 영혼들을 우리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의 소유가 많지 않더라도,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모은 모든 돈은 잃을 것이 100% 확실합니다. 반면 하늘에 쌓아 둔 모든 보상은 100% 확실히 지켜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 소유물을 팔아 구제하고 낡아지지 않는 돈주머니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둔 변함없는 보물이니, 그 보물은 바로 우리의 것이며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도둑질하지 못하는 안전한 곳입니다(마 6:20). 그런데도 하나님의 백성 대부분은 땅에 돈을 쌓는 데는 열중 하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 데는 소홀합니다.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것을 내어놓아야 비로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사의 부가 천국으로 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6:12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예수님은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않으면 “너희의 것”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남의 것”은 다른 사람의 돈과 소유물을 의미합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재물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학개 2:8은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라고 하였고, 시편 기자는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시 24:1). 욥기 41:11은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라고 하였고, 신명기 10:14은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남의 것”으로 우리는 단지 청지기로서 그분의 것을 맡아 관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다 하나님께 속하며, 그분은 우리가 그것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너희의 것”은 참된 부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의 선물을 말합니다. 그것은 지혜, 거룩함, 평강과 같이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재물이라는 “작은 것”(10)에 충성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에게 속한 것을 영구히 주실 것입니다. “너희 자신의 것”은 11절에서 언급된 “참된 것”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지혜와 거룩함, 평강 같은 것들로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영원한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선하고 완전한 은사의 주인이시지만, 이 은혜들은 “작은 것”(10)에 충성한 자들에게 보상으로 주어지며, 일단 주어지면 영구히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것”은 비록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실제로는 변치 않는 우리의 소유가 되며, 세상의 재물처럼 불안정하게 빼앗기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그것이 영원히 우리에게 속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10절에서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을 대조하셨습니다. 또한 11절에서는 “불의한 재물”과 “참된 것”을 대조하셨습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남의 것”과 “너희의 것”을 대조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 “불의한 재물”, “남의 것”은 모두 현세적인 자원이나 돈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 즉 하나님께 속합니다. 반면 “큰 것”, “참된 것”, “너희의 것”은 모두 하늘에 쌓인 영원한 보물을 가리킵니다. 아무도 그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마 6:20).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충실한 청지기가 시간적 공급만 하는 이 불의한 청지기와는 대조적으로 영원토록 참된 부를 마련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가 제공한 것은 순간적인 것이었지만, 충성된 청지기는 영원한 차원에서 진정한 부요를 준비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돈’을 ‘아주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믿음을 가진 자이든,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이든 돈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심지어 교회를 운영하고 선교를 위해서도 돈은 중요한 수단입니다. 한 가정이 존립하기 위해서도 돈은 필수적입니다. 이것이 기초 바탕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통장의 잔고가 바닥이 날 때 이를 위해 기도하지만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예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지극히 큰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돈을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하시면서 더 큰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돈이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그것에 충성하는 사람이 “큰 것”에서도 충성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분이 청지기임을 상기시키고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충성스러워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누가복음 16:13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집 하인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라면, 돈은 우리의 종이 될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자원을 사용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돈의 종이 될 것이고, 돈은 끔찍한 주인입니다! 우리는 삶을 투자하는 대신 낭비하기 시작할 것이고 , 언젠가 영광의 문으로 들어서면서 “친구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헨리 필딩은 “돈을 당신의 신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돈이 마귀처럼 당신을 괴롭힐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예수님은 “돈을 당신의 종이 되고, 오늘의 기회를 내일의 배당금을 위한 투자로 삼으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십시오! 구주께 인도해야 할 영혼들이 있으며, 우리의 돈은 그 일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4-24장을 빌려  오십시오  . )

하인은 두 주인 사이에서 균형이나 중립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두 주인을 동시에 습관적으로 섬길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종은 한 주인만 섬기는 데에 그의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소진할 것입니다. 종은 시간제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100% 한 주인에게 속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주인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는 어느 때나 다른 주인과 관계를 맺을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의 모든 존재와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은 사실상 주인의 소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원리를 이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인에게는 오로지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습니다. 중간 지점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직원은 여러 명의 사장을 두고 일할 수 없습니다. 만일 두 명의 사장이 있다면 두 사장은 한 직원의 우선순위와 업무를 놓고 다툴 것입니다. 만약 두 사장이 동일한 업무를 요구한다면, 직원은 두 교대로 일하거나 상사 중 한 명을 화나게 할 위험을 무릅쓰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두 사장의 모순된 명령에 종이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서로 대립하는 고용주는 직원들을 지치게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물과 기름 섞이지 않는다”는 옛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여러 다른 방식으로 봅니다. 거짓말쟁이이면서 동시에 진실한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부도덕하면서 동시에 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인  동시에 영적인 사람일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인정과 하나님의 인정을 동시에 얻을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양쪽을 모두 활용하려고 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죄에 속아 위엣 것을 생각하지 않고 땅에서 천국을 만들려고 하지 않도록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무엇을 쌓아 두든, 시간과 에너지를 그런 생각에 쏟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돈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쉽게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돈은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은 엄하고 기만적인 주인입니다. 부는 권력과 지배력을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큰 재산은 하룻밤 사이에 벌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으며,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건강과 행복, 그리고 영생을 가져다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실 때 우리는 마음의 평화와 안전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적 소유의 노예가 되면서 동시에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타협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위해 살 것인지, 어떤 주인을 섬길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미워하다”는 것은 덜 사랑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29:31을 보면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라는 구절에서 “사랑 받지 못함”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사네’로 ‘미움을 받다’는 뜻입니다. 이는 문맥상 ‘덜 사랑받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또한 말라기 1:2-3에서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도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였다는 의미라기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선택과 은혜로 차별적으로 사랑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는 말에서 ‘미워하다’는 말은 부모와 가족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이 모든 관계보다 절대적으로 우선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섬길 수 없다”는 공리적 원리는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도 직접 적용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든지 재물을 섬기든지 한 주인을 섬겨야지, 둘 다 섬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주인의 선택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의 결과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영원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갖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재물의 소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번 돈으로 무엇을 하느냐입니다. 현세적인 삶을 위해 돈을 쓴다면 재물이나 재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을 위해 돈을 쓴다면 분명히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선택은 나 자신에게 달려 있지만, 우리가 거두는 결과는 나의 선택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진리는 우리의 마음과 지갑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며, 많은 사람들은 영원이 아닌 현세만을 위해 살기 때문에 이 구절을 매우 불편하게 느낍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라는 뜻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복음은 편안한 자에게는 고통을 주고, 고통받는 자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재물이라는 단어의 원어에서 유래된 맘몬(mammon)은 원래 전혀 나쁜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랍비들은 “네 이웃의 맘몬을 네 것만큼 소중히 여기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이웃의 물질적 소유물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맘몬이라는 단어는 매우 기묘하고도 의미심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맡기다’라는 뜻의 어근에서 유래했는데, 맘몬은 은행가나 어떤 종류의 금고에 맡긴 것을 뜻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재산을 단순히 보관된 소유물이 아니라 삶의 안전과 보장의 근거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재산은 단순히 내가 가진 것을 넘어 내가 의지하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신뢰가 하나님에게서 재물로 옮겨진 것입니다. 결국 맘몬은 대문자 M으로 표기되고 신격화된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맘몬이라는 단어의 역사는 물질적 소유물이 본래 가져서는 안 될 삶의 자리를 어떻게 빼앗아 갈 수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존 칼빈은 “부가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하나님은 권위를 잃게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소유물은 흥미로운데, 조심하지 않으면 소유물에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을 가늠하는 두 가지 중요한 시험은 부와 가난입니다. 부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복당하고, 가난한 사람은 그것을 탐하기 때문에 정복당합니다. 매튜 헨리는 “가난한 사람들은 세상의 부에 대한 지나친 욕망으로 인해 위험에 처해 있는 반면, 부유한 사람들은 부에 대한 지나친 즐거움으로 인해 위험에 처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금은 모든 금속 중 가장 무겁지만 탐욕으로 인해 더 무거워집니다. 금(gold)과 신(god) 사이에는 글자 하나 차이뿐입니다. 매튜 헨리는 “세속적인 사람들은 금을 신으로 삼고, 성인들은 신을 금으로 삼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지 스윈녹은 “많은 사람들이 금을 소유하다 보니 신을 잃었다.”고 하였습니다. 부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가 아니며, 가난은 하나님의 노여움의 표시가 아닙니다. 사실 돈은 가장 불만족스러운 소유물 중 하나입니다. 돈은 분명 어느 정도 걱정을 덜어주지만, 그만큼 더 많은 걱정을 안겨줍니다. 돈을 얻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고, 지키는 데는 근심이 따르며, 사용하는 데는 유혹이 따르고, 남용하는 데는 죄책감이 따르고, 잃는 데는 슬픔이 따르고, 처분하는 데는 혼란이 따릅니다(JC 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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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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