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 구석에 있는 오른손 마른 사람을 주목하셨습니다. 동시에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지 엿보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을 주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른손 마른 사람을 한가운데 세우시고 종교 지도자들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6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
또 다른 안식일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장면은 제자들이 밀밭에서 곡식을 잘라 먹은 사건 직후에 발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방금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셨는데 이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이 이름 없는 사람의 마비된 손을 치유함으로써 안식일에 대한 자신의 주권과 신성을 입증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장소로 옮기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실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6-11절에서도 같은 패턴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 그의 말씀의 권위를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심으로 죄 사함의 권세자가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심으로 영적으로 병든 자를 치료하러 오신 영적 의사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시고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으로 이를 증명하셨습니다.
오른손 마른 사람
예수님은 오른손 마른 사람을 우연히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오른손 마른 사람이 회당에 있다는 것을 아시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도전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치유를 안식일 이후로 미룰 수도 있었지만, 이 사람을 치유하심으로 그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반복해서 병을 고치셨습니다(눅 4:31-35 ; 13:10-17 ; 14:1-6 ; 요 5:1-9 ; 9:1-14 ).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의 역사는 평일이나 안식일이나 구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면서 일하시는 것을 쉬지 않으셨습니다(요 5:17).
누가는 회당에 있던 사람이 오른손 마른 사람임을 구체적으로 드러냄으로 그 사람의 고통스러운 삶을 드러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대부분은 오른손잡이이고 왼손잡이는 장애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사 시대의 왼손잡이 에훗입니다. 그는 왼손잡이로 사람들의 무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침략자에게 공물을 갖다 바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처음부터 사람을 모아 전쟁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왼손잡이라고 무시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사사로 세우심을 받아도 사람들은 그의 신체적 결함 때문에 그를 사사로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시받는 왼손잡이 에훗을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쓰셨습니다. 에훗이 에글론 왕을 홀로 죽이고 난 후에 사람들이 그의 용맹과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따랐습니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백성들을 이끌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였고 이스라엘은 80년 동안 평화의 시대를 누렸습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은 은유적으로 탁월함과 힘을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능력을 행하시거나 전쟁을 하시며 구원하시거나 심판하실 때에도 오른손을 사용하신다고 표현했습니다(사 48:13; 신 33:2; 시 74:11).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할 때 우선적인 축복이 오른손으로 차남인 에브라임에게 주어졌습니다(창 48:17-20). 맹세를 할 때도 오른손을 들어서 맹세했습니다(사 62:8; 계 10:5-6). 왕의 오른쪽에 앉는 것은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시 45:9; 110:1; 행 2:33; 히 1:3).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구원받은 신자들은 그분의 오른편에 있게 될 것입니다(마 25:31-33).이와는 반대로, 왼쪽에 앉는 것은 은유적으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마 25:41).
회당에 있는 사람이 오른손이 말랐다는 것은 그가 농업사회에서 사람 구실을 하지 못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오른손에 장애가 있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힘을 쓰거나 정교한 일을 하려면 두 손이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들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바짝 마르고 축 처진 오른손을 감추기 위해 긴 소매로 가리었고 오른손으로 하는 맹세나 악수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였고 장애인이라는 것 때문에 늘 사람을 피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오른손이 말랐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도 메말라 오그라들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팔다리를 움직이려면 뇌와 신경망이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른손 마른 사람은 오른손으로 가는 신경망이 손상되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신체 일부에 피가 공급되지 않으면 괴사하고 신경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근육이 발달되지 못해 마비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메마르게 되어 마비됩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가지가 어떻게 생명을 유지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5-6).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생명의 진액을 공급받아야 생명을 유지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메마른 가지가 되어 불쏘시개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6:7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고발할 증거를 찾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이미 오른손 마른 사람이 회당에 있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 위선자들은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할 시간에 예수님을 비난할 명분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백성의 목자가 아니라 종교 경찰관이었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와 같았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응급환자가 있어도 안식일에 치료해서는 안된다는 이상한 고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존중하는 가치관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사람을 정죄하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쉬지 못하고 사람을 고발하고자 증거를 찾는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안식일 법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고자 하였고 그들은 사람을 정죄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영적인 의사였지만 그들은 사람을 정죄하고 죄인으로 만드는 검사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죄의 덫에서 백성을 해방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람을 정죄의 덫에 걸리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데 예수님의 말씀과 치유 사역을 훼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악하고 교만하고 완고한 마음 때문에 항상 마음이 복잡하고 시끄러웠습니다.
누가복음 6:8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관찰함으로써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감각은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얼굴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뭔가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보는 눈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나 습관, 또는 그가 이룬 업적 등으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삼상 16:7).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가르침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그분을 염탐하러 온 것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지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함정을 놓은 것을 아셨지만 그들의 악함을 드러내시기 위해 정면 도전하셨습니다. “생각”이라는 단어는 불쑥 튀어나온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오랫동안 생각하고 계획하고 계략을 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오랜 계획을 다 아셨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아비 마귀에게서 났고 아비의 욕심대로 행하고자 하였으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는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였습니다(요 8:44 ).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심으로 그의 신성을 나타내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삼상 16:7; 왕상 8:39; 대상 28:9; 렘 17:10; 겔 11:5; 요 2:23-25). 예수님은 그들이 놓은 함정으로 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추악한 계획을 다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 사람과 그의 오그라든 손을 볼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중앙 무대에 세우셨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구석 자리에 있었고 손 마른 것 때문에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지 않기 위해 늘 조용히 지냈고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유대 사회의 변두리를 맴돌았습니다. 그는 그 어디에서도 무대의 중앙에 선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무대의 중앙에 세우시고 그를 그 날의 주인공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핸디캡으로 인해 위축되거나 자신감 없이 살아온 자들을 그의 역사의 무대의 중앙에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손 마른 사람을 주시하시고 종교 지도자들의 섬뜩한 위협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가 예수님 안에서 새 인생을 살도록 그를 일으켜 “한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변 인생을 살아왔던 사람을 일으켜 무대의 주인공으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 병든 자, 연약한 자, 기 죽어 사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오랜 세월 침대에 누워 살던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시고 일어나 걸어가는 인생을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공공의 적이며 만인의 지탄의 대상으로 끔찍한 외로움과 따돌림 받는 아픔을 겪으며 살아왔던 세리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심으로 그를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접촉하기를 꺼려하고 공동체 밖에서 외롭게 살아왔던 불가촉 천민인 나병 환자의 환부에 손을 대시며 그를 깨끗하게 하심으로 그를 완전히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제는 자기의 마른 손을 감추면서 남이 볼까봐 마음 졸이며 구석진 곳으로만 피하며 살아왔던 손 마른 사람을 사람들 “한 가운데” 세우시고 주변 인생이 아닌 주인공의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안식일의 규정을 고의적으로 어기시고 자신만의 길을 가시고자 하셨습니다. 그 동안 잘못된 관행을 뒤엎고 안식일의 새로운 개념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안식일은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6:9
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파놓은 함정으로 과감하게 향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함정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거짓말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십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결코 마귀가 놓은 덫에 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짓을 말하는 자들이 덫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진리에 기초한 질문 하나에 그들이 놓은 덫이 스스로 걸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양자택일의 질문을 하심으로 그들을 곤란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일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가치입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것은 선한 일이고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안식일에 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그들이 만든 전통은 선한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과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악을 행하거나 죽이는 일을 결코 옹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은 장로들의 전통의 비논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논리에 설득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전통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전통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압박의 질문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침묵하는 것이었습니다(막 3:4). 그들은 침묵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분노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질문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압도하신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충만하셨기 때문입니다(사 11:2).
예수님의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결국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을 듣자 스스로 모순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결국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 악을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됩니다(약 4:17).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신 목적은 사람들을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돕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의 수호자라고 공언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랍비의 규례를 위반한 것을 꼬투리로 은밀하게 그를 죽이고자 악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규정해 놓은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이 가르침은 구약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제시되었습니다(신 23:25; 미 6:8; 시 10:18).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동의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할 근거를 잃게 됩니다. 만일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생명을 멸하는 자들이 됨으로 구약 성경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것이 됩니다. 그들은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어 침묵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종교적 신념은 때로 무서운 악을 저지르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신념은 최소한의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보편 가치를 무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종교가 인간의 불행과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부담과 속박과 두려움 가운데 가두어 두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융통성 없는 해석에 집착함으로 인해 하나님이 의도한 것과 반대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그가 보내신 구원자를 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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