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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사랑의 계명을 주신 예수님(누가복음 6:27-28)

예수님은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원수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원수 사랑은 사람의 능력과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원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깊이 깨닫고 그에게 기도할 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27

27-36절은 네 가지 복과 네 가지 화의 각각이 마지막 항목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사항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으로 살면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습니다(딤후 3:12). 이때 우리는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을 원수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믿음 때문에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볼 때 그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떠올라 피하기 쉽습니다. 아니면 당한 만큼 똑같이 되갚아주고자 하는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혹은 그들을 위한 저주의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그들에게 임하도록 기도하기도 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기도하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박해하는 자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의 대반전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을 선대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피하거나 배척하고(6:22), 모욕하고(6:28), 신체적으로 학대하고(6:29), 고소합니다(6:30). 이것은 우리가 예상해야 하는 것입니다(빌 1:29; 딤후 3:12).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입니다. 이 소금은 죄로 인한 상처를 쓰라리게 하며 빛은 어둠과 같은 죄를 드러냅니다(마 5:13-16). 그들은 소금과 같이 세상에서 맛을 내는 역할을 하며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지연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소금이 상처에 닿으면 쓰라린 것과 같이 소금으로서의 존재는 죄로 인한 상처를 쓰라리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하고 배척합니다. 그들은 소금과 같이 쓰라린 진리의 말로 그들의 죄로 인한 상처를 쓰라리게 합니다. 그들은 소금과 같이 진실하고 의로운 행동 때문에 사람들의 죄가 드러나 세상 사람들은 소금의 존재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빛도 어둔 세상을 비추는 역할을 하지만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죄가 드러남으로 빛을 싫어합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선하고 의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원수의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자기를 향한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상대방에 대한 자세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뜻밖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깜짝 놀랄만한 완전한 반전입니다.

예수님은 원수에 대해 소극적 방어가 아닌 적극적인 공격을 말씀하셨습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듯이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으로 공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대적하고 불순종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향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23:34).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희생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원수 사랑은 복음의 가장 위대한 특징입니다. 복음은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영접하고 믿을 때 하나님은 아무런 값없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론이 아닌 행함으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만 해도 은혜와 영광인데 자기 아들을 희생하시면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것은 사랑의 극치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위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20). 숯불은 ‘회개의 표’, ‘마음의 불’, ‘양심의 부끄러움과 가책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 속담은 원수가 배고플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한 결과로 그리스도인이 원수의 양심에 준 수치를 말합니다.

우리가 원수들의 상처를 주는 행동에 대해 부드러운 용서로 반응할 때 그 사람은 익숙하지 않아 양심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입니다. 원수의 불친절함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친절은 그 둘 사이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원수를 사랑하되 말로만 하지 않고 그들의 필요를 제공하고 선행으로 갚을 때 그 사람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더이상 악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을 대하는 다윗의 태도에서 원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우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시간이 지나면서 교만해졌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부어 사울을 대신할 왕으로 조용히 준비시키셨습니다. 이에 사울은 위협을 느꼈고 승승장구하는 다윗을 보고 시기심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는 데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원수를 자기 손으로 직접 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사울을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라고 여기고 그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삼상24:6). 

그리스도인들이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선행이 그들의 양심을 일깨워 그가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인은 친히 원수를 갚을 권한이 없고 그 모든 권한은 의로우신 하나님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길은 공격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길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길은 상대방으로 상처를 입었을 때 그것을 그대로 갚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길은 이에 대항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며 선대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길은 “승리”에 집착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길은 파괴하는 것이지만, 주님의 길은 사랑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대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으셨을 때 어떻게 대응하셨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옹호하셨지만 결코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원수들과 맞섰습니다. 예수님은 약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거역하는 자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셨고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원수에 대해 미운 마음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면서 그에게 불순종했던 과거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고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른 자들로 불순종의 아들들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엡 2:1-5). 우리는 나 자신이 본래 어떤 죄인이었는지 돌이켜 볼 때 우리의 원수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원수 사랑의 계명을 “너희 듣는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듣는 자”는 제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동안 유대인들은 옛 계명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라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에 원수에 관한 언급은 레위기 19:18에 나와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 구절은 원수를 갚지 말고 원망하지 말며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이웃 사랑은 자기 동포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할례 없는 백성이라 하여 외인 취급을 하였고 그들을 원수처럼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이방인과 혼인관계를 맺지 말고 이웃 나라들의 침공을 많이 받은 것에서 그들을 하나님의 원수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구약의 이분법적 개념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은 이방 세계로 확대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 만민에게 구원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방 세계에 대한 적대감을 버려야 합니다. “너희 듣는 자”는 예수님의 이방 세계를 향한 뜻을 영접하고 복음 전파자가 될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원수 사랑의 계명은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타락한 인간이 자연적으로 반응하는 방식과 정반대되는 가치관입니다. 이 명령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타락한 인간의 악한 본성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충격적이고 급진적인 명령입니다. 육신의 귀로 예수님의 이 명령을 듣는다면 그 반응은 저항과 반항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만이 이 말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듣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기 때문입니다(엡 5:2). 이 명령은 현재 명령형으로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사랑하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될 때 가능합니다. 원수 사랑은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하나로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할 때 할 수 있는 계명입니다(갈 5:22-23). 우리가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속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하면 다른 사람이 복음을 나눌 수 있는 문이 열릴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46). 예수님은 이어서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마 5:47). 그러므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예수님과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신자는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이 잘 될 수 있도록 구해야 합니다. 특별히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받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기도함으로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사랑과 그의 용서의 메시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과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 전도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 명령은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의 왕의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사랑은 세상의 모든 종교 중에서 유일합니다. 세상의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들이 추종자들에게 가르친 사랑의 유형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기준에 근접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사랑은 인간의 공력과 행동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구약은 구체적으로 이웃 사랑을 명했지만(레 19:18), 아무도 원수 사랑을 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시하신 원수 사랑은 ‘미친 사랑’입니다.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중보기도를 통해 원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원수에 대한 미움이 쉽게 가시지 않지만 그들의 영혼 구원과 그들의 인생 문제가 해결되어 범사에 잘되기를 기도하기를 실천할 때 하나님은 위로부터 원수 사랑의 놀라운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선을 선으로 갚을 수 있지만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선 초자연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사랑을 직접 실천하신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때 행복합니다. 미운 감정에 사로잡힐 때 그것은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파괴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파괴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쥐를 없애려고 자기 집을 불태우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고치고, 먹이고, 위로함으로써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완벽한 모범으로 삼아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들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원수를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에게 해야 합니다(갈 6:10). 우리는 오직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아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히 13:16). 우리는 우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마 5:16). 우리는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 우리는 구주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도와주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6:28

“축복하다”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율로게오’(eulogeo)로 칭찬과 감사로 좋게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축복하실 때 그분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에게 행복을 주십니다. 

누가는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메시아를 잉태했을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1:42). 사가랴가 약 9개월 동안 벙어리 훈련이 끝난 후 그가 하나님을 찬양했을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1:64). 시므온도 메시아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을 때도, 예수님의 부모를 축복했을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2:28, 34). 

“저주”(kataraomai)는 “축복”의 반대말로 초자연적인 힘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거나 재난이 임하도록 기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죄악된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과 정반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세상의 비난과 정죄, 저주와 욕설 등의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심지어 자기를 저주하거나 욕설을 퍼붓는 자들을 위해 축복의 말, 즉 좋은 말, 덕이 되는 말, 은혜가 되는 말, 긍정적인 말,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말을 건네야 합니다. 이것이 축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은 인간의 본성상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자기의 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을 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저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주의 기도를 받지 않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의 말씀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의 축복의 기도로 우리의 원수가 그리스도께 인도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 둘 것입니다. 

사람들은 축복의 말보다 저주의 말을 잘합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축복의 말을 함으로 습관화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정의의 하나님께서 이를 보복하시고 그들의 악행을 갚아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대하 24:22; 시 137:8; 렘 15:15). 그러나 예수님은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하며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저주의 기도를 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대신 축복의 기도를 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악행을 가하고 합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미움의 감정을 품고 저주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한 축복의 기도를 명령하셨지만 쉽게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면 미움과 복수의 감정이 사라지고 축복의 마음이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번에 한 가지 생각만 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는 죄악된 생각으로 오염되어 있고 그 독성이 퍼져 있습니다. 특히 미움과 저주의 마음으로 심령이 피폐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축복의 기도를 연습하면 미움과 저주의 독에 오염된 마음이 해독되어 정화될 것입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축복의 기도의 삶은 우리를 용서와 화해의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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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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