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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주는 삶(누가복음 6:29-30)

29-30절은 제자의 주는 삶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 이름으로 받는 모욕을 참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욕을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6:29-30

누가는 원수 사랑의 명령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해 네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29-30).

첫째는 뺨을 맞는 것과 같은 모욕을 당할 때 저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39에서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고 구체적인 방향까지 제시했습니다.

보통 오른손잡이가 뺨을 때릴 때 상대방의 왼편 뺨을 가격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른편 뺨이 먼저 언급한 이유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뺨을 때릴 때 손등으로 가격했기 때문입니다. 즉 오른손의 등으로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백핸드로 가격하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뺨을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정말로 그 사람을 모욕하는 행위였습니다. 랍비의 율법에 따르면, 손등으로 누군가를 때리는 것은 손바닥으로 그를 때리는 것보다 두 배나 모욕적이었습니다. 이 경멸은 상대방을 무가치하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뺨을 맞는 일은 그렇게 흔히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런 일을 당한다면 엄청난 모욕을 느끼며 분노할 것입니다. 과거 체벌이 일상화되던 때에 이렇게 뺨을 때리는 일은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현대적으로 해석할 때 크고 작은 모욕을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라고 하셨는데 이는 상대방을 더 자극하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사야 50:6,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라는 말씀처럼 분노의 감정으로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씀에 기초할 때 “저 뺨도 돌려대라”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할 때 참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크고 작은 모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단지 믿는다는 이유로 모욕을 당할 때 분개하고 억울해 하고 보복을 다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이유는 그 앞에 있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히 12:2).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욕, 상처, 고통, 거절, 학대를 받는다면 사랑스럽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편 뺨을 대는 것은 보복과는 반대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는 반격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심판의 집행을 주님께 맡기겠다는 원칙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자존심을 삼키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 보복하는 권리를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개인적인 복수를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부당하게 굴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종에게 뺨을 맞으셨습니다(요 18:22). 이때 예수님은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라고 그들의 부당함을 지적하셨습니다(요 18:23).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29절의 명령과 배치됩니다. 예수님은 다시 치라고 다른 쪽 뺨을 돌려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이성적으로 따지시면서 그들의 행위가 부당함을 침착하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뺨도 돌려 대라는 구절을 해석할 때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아도 보복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는 침착하게 부당한 처사에 대해 항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증오나 보복하지 않고  묵묵히 박해를 받아들이되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는 항변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자의 선한 행동을 이용하여 더 악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사명을 완성하기 위한 고난은 묵묵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그가 어떻게 모욕을 참으셨는지를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그의 등에 채찍을 맞으셨으며 뺨을 맞기도 하셨고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께 침 뱉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쳤습니다(마 27:30). 이때 예수님은 그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심으로 분노와 보복의 감정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끼쳤으므로 우리도 그 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마땅합니다(벧전 2:21).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고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오게 되었습니다(벧전 2:22-25).

우리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하며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해야 하며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양심에 호소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롬 12:17-21). 

둘째는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라고 되어 속옷이 먼저 언급되어 있고 겉옷이 나중에 위치하고 있습니다(마 5:40). 겉옷은 coat 또는 cloak로 ‘소매 없는 망토’를 말합니다. 속옷은 tunic 또는 shirt로 통으로 짠 긴 옷을 말합니다.

로마 통치하에서 유대 민족은 대부분 매우 가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거의 모든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한 가지가 있었는데, 바로 망토와 같이 생긴 겉옷이었습니다. 망토는 매우 중요한 의복이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몸을 따뜻하게 하는 역할을 했고 더운 날씨에는 햇빛을 차단했습니다. 밤에는 이불이나 베개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의 망토는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출애굽기 22:26-27에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겉옷을 전당 잡으면 해가 지기 전에 그 겉옷을 돌려주어야 그가 잠잘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겉옷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독하게 가난한 자입니다. 그는 자기를 가릴 수 있는 옷도 없이 알몸으로 사는 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몸도 제대로 가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고 수치스럽게 사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자들을 볼 때 생존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겉옷을 구하는 자에게 속옷까지 주라는 것은 그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속옷 위에 겉옷을 걸쳐야 그는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존엄을 지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복지제도가 발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당시에는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채무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채무자들은 채권자에게 겉옷까지 빼앗겨 자기 몸을 가릴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진 자의 구제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부자들은 로마의 과중한 세금 때문에 재물을 숨기기 위해 갖은 애를 썼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 뿐만 아니라 가진 자들에 대한 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이 막무가내로 그들의 생존권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불쾌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들의 가난의 원인이 거지 근성과 게으름과 나나태의 탓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생존을 위해 정부나 부자들에게 과도한 요구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런 자들의 요구를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요구보다 더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이 최소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갖고 살도록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 되었든, 사회적인 제도가 되었든 우리의 가진 것을 나누고자 하는 기본적인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부자들에게 주는 경고도 있고 가난한 자들의 내면 문제에 대한 지적도 있습니다. 남편에게 주는 권면도 있고 아내에게 주는 권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에게 주는 권면을 요구하면 안됩니다. 부자는 예수님이 가난한 자에게 주는 예수님의 권면을 가난한 자에게 요구하면 안됩니다.  성경 말씀의 적용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런 종류의 사람이 받고 회개해야 하는 말씀이라고 분류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철저히 개인적으로 자기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라고 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이 문자적 적용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현대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 이웃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엄을 갖고 살도록 배려하고 주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구하다”는 동사는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또한 이 단어는 무릎을 꿇고 겸손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표현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데 이 일을 제자들의 주는 삶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이런 박애 사상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로 발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게 그들의 필요를 구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중의 새를 먹여 살리고 들판을 꽃으로 입히듯이 우리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는 것이 남는 삶입니다. 세상에서 모은 재산은 죽을 때 단 하나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은 하늘에 쌓아둔 보물이 되어 하늘에서 엄청난 이자와 함께 큰 보상으로 주어질 것입니다(마 6:20). 

우리가 주어야 할 대상은 구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네게 구하는 자”는 영어로 everyone who asks로 ‘구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예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는데 그러나 이 말씀은 ‘주는 삶’을 강조하는 과장된 표현입니다. 바울은 불순종하고 악영향을 끼치는 자들에게서 “멀리 떠나라”, “사귀지 말라”,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라고 권면한 것에서 우리는 무조건 달라고 떼쓰는 사람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고전 5:9-10; 살후 3:6, 14).

여기서 예수님은 주는 자의 자세를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푸는 일에 관해 비슷한 권면을 하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스펄전은  우리에게 “관대하라. 구두쇠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게으름과 구걸을 조장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주라”는 개념은 선물로 주는 것 뿐 아니라 빌려주는 것도 포함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구하는 것을 빌려주어 갚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게으름과 나태를 정죄합니다(잠 6:6-12; 20:4; 24:30-34; 살후 3:10).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관대함을 이용하여 대출금을 갚지 않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제를 행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원칙은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만일 주는 것이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병들이고 거지 근성을 키우는 것이라면 단호히 거절해야 마땅합니다.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그리스도의 관심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주는 삶이요 둘째는 사람을 진정으로 살리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주는 것이 그 사람을 망하게 하고 병들게 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살리는 길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선택을 하건 간에 기본적으로 자기의 것을 주는 삶이 몸에 배여 있어야 합니다. 일할 수 있지만 일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너무 게으르거나 일하기를 꺼리거나 도박과 술로 번 돈을 날리는 사람들에게 무제한으로 돈을 주는 정부 정책은 사실상 그들의 인격을 파괴했습니다. 

무제한 주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나 자녀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며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일의 가치를 가르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얻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고자 할 때 지혜를 발휘하기 위해 좀더 조직화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다.

자선 단체나 구호 단체는 이런 일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그들은 정말로 꼭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선별합니다. 또한 그들이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그들의 자활을 돕는 프로그램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구제를 가장 적절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이런 단체를 세우셨습니다. 이는 사도행전에서 일곱 집사를 세워 그들이 누구도 원망하는 일이 없이 구제하는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한 예에서 배운 것입니다(행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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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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