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제자는 탁월해야 합니다. 제자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제자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제자의 탁월성은 불신자의 도덕성을 훨씬 뛰어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과 같이 자비로운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누가복음 6:31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황금률
31절은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나를 대하듯이 남을 대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접받기를 바라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행하기가 불가능하고 성령님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며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황금률은 다른 종교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교에서는 “남이 네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황금률과 유사하지만 ‘하지 말라’는 부정적 언급으로 되어 있고, 수동성에 의존합니다. 예수님의 황금률은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명령입니다. 동방 종교에서는 ‘하지 말라’고 하면서 부정적인 행동을 억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긍정적으로 행동할 방법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황금률은 다른 종교의 윤리와 차별성이 있으며 그들의 요구 수준을 뛰어 넘어섭니다. 황금률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포함합니다(35).
사람들은 받을 자격이 있든 없든 보편적으로 존중, 사랑, 감사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황금률을 따라 살 때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스펄젼은 “모든 사람들이 황금률에 따라 행한다면 노예 제도, 전쟁, 욕설, 타격, 거짓말, 강탈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문제 해결의 원칙으로 황금률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 사회는 우리의 이기심과 사적인 감정이 인간 관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황금률은 불신자들도 감탄하는 교훈입니다. 남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처럼 남에게 행하거나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이방인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들로부터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먼저 다른 사람을 대접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주의 발자취를 걷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대접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게 그대로 행하셨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자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라고 하심으로 자기 사랑에 기초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함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에 대해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레위기 19:18,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에서도 똑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끔찍하게 사랑합니다. 배가 고프면 음식으로 채워주고 목이 마르면 물로 채워줍니다. 몸이 아프면 약을 먹여 주고 침대에 누워 쉬게 해줍니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구입하여 만족을 채워줍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필요를 가장 잘 압니다. 우리는 이처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목마르면 다른 사람도 목마른 것을 생각하고, 내가 배가 고프면 다른 사람도 배가 고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나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 그들의 필요를 알게 되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황금률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기 사랑이 무척 중요합니다.
황금률은 구원의 전제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며 신자의 실제 삶의 실천 기준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의 동력은 예수 그리스도
또한 이 말씀은 우리가 호의를 베풀면서 내가 호의를 베푼 사람으로부터 똑같은 호의를 기대해서는 이 계명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기대는 항상 실망을 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지 말고 선행의 습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일말의 보상을 바란다면 선행을 하게 하는 동력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의 동력은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나를 사랑하셨고 먼저 관심을 보이셨으며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권면하면서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를 소개했습니다(빌 2:3).
우리가 이 황금률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빌 2:5).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6-8).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다른 사람들의 필요, 감정, 관심사에 민감하고 그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사랑의 감수성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고 그 은혜를 붙드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끼고자 하면서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황금률을 실천할 때 사람들은 이를 실천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이로써 우리는 그들을 영생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불신자들에게 실질적인 관심을 보일 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알게 되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능동적으로 행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8).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로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내려 보내십니다(약 1:17).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과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차이를 극복하도록 황금률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비가 필요할 때 자비를 받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데 인색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받기를 기대한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용서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은혜를 입었으면 우리는 동일하게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황금률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동일하게 다른 사람에게 실천하는 삶입니다.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먼저 취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당장 우리는 내가 받고 얻을 수 있는 것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황금률은 ‘주는’ 방법, 즉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나누고, 관심을 기울이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천국 시민의 헌장입니다.
누가복음 6:32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라
그리스도인의 이웃 사랑은 죄인들의 사랑을 초월합니다. 제자들의 이웃 사랑은 차별성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행동은 초자연적인 행동이며, 궁극적으로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성령께 굴복할 때 이 계명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세상 사람들은 이 사랑이 세상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임을 직감하게 됩니다. 그들이 이 사랑의 신비에 매료될 것이며 이 사랑의 근원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마 5:16).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보다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적 탁월성을 갖지 못할 때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되어 밖에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마 5:13). 그리스도인들은 혐오와 배타의 감정을 버리고 대상에 상관 없이 꾸어주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사랑의 감정과 친절의 행위는 우리 주님의 것을 닮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답을 받고자 이런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인정과 칭찬을 얻기 위해 선행의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다면 황금률의 실천은 불가능합니다.
죄인들도 서로 사랑합니다. 자기의 자식을 끔찍하게 아끼며 자기 사람을 잘 챙겨 줍니다. 가족 사랑은 인류의 보편적 윤리입니다. 기업은 물건을 팔기 위해 고객을 왕으로 모시고 그들의 마음을 살 것이며 은행은 이자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돈을 빌려 줄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신용을 생명으로 알고 신용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감수할 것입니다. 죄인들도 이렇게 사랑하고 의리를 지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의 것을 주는 특별한 삶의 방식을 취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늘의 상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됩니다. 한 사람이 신자의 선행과 사랑으로 마음을 돌이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생을 얻는다면 하늘에서는 천국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원수들에게 선대하라
우리는 나에게 선대하는 자에게는 잘해줍니다. 그래야 다음 기회에 선대를 받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27절,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를 다르게 표현하여 강조한 것입니다.
은혜를 갚을 줄 알고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당연하고 쉽습니다. 인간으로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덕적인 결함이 있는 자로 취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고 냉대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세상적으로 볼 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를 적극적으로 해치려는 적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세상적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로 사는 우리에게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어 탁월한 선행을 요구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하셔서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는 우리가 죄인이고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를 상속자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로마서 5:8-11; 8:16-17; 요 15:15). 예수님은 그를 대적하는 자들의 비난과 공격과 모욕을 다 참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벧후 3:9). 우리는 성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희생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선대하지 않은 자들에게도 선대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34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받기를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
이 구절은 30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라는 구절과 연결되는 것으로 이를 다시 강조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궁핍한 이웃이나 친구에게 돈을 빌려 주기도 합니다. 돈을 빌려주는 것은 사실 큰 마음 먹고 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려줄 때 대부분 돌려받기를 바라고 빌려줍니다. 이런 거래는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꾸어주기 때문입니다.
돈을 빌려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자를 받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그 친구의 마음을 얻어 장차 그 친구의 도움을 받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키케로는 “젊은이나 늙은이에게 친절을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노인은 갚지 못하기 전에 죽기 쉽고 청년은 갚는 것을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합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빌려주는 사람들에게 빌려줍니다. 최소한 그리스도인은 이 기준을 넘어서 살아야 합니다.
생존을 위해 대출을 받는 궁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은행과 같은 대출업이 모두 고리대금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돈을 빌려줄 때 이자를 받지 않도록 합니다(출 22:25).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제도적으로 가난한 자를 착취하지 않도록 보호하고자 하셨습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를 돌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의 책임에 대해 일관되게 말합니다.
그들은 돈을 빌려줄 때 전당을 잡는데 옷을 전당잡지 않도록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전당잡힌 옷은 가난한 자의 유일한 옷이기 때문입니다. 그 옷은 겉옷을 말하며 추울 때 몸을 따뜻하게 하고 더울 때 햇빛을 가려주며 잠 잘 때 이불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었습니다. 그가 겉옷마저 전당 잡히면 그는 알몸으로 지내야 하고 이로 인해 수치를 당해야 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해야 하는 불쌍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출 22:26-27).
또한 전당을 잡을 때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 24:6). 다시 말하면 맷돌은 농업에 사용되는 일반적인 도구로 이것을 전당 잡히면 채무자가 일할 수 없고 꾼 것을 갚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농작물을 추수할 때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어야 합니다(레 19:19-20).
그러나 예수님은 더 나아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이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돈을 꾸어주더라도 되돌려 받을 가망성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줍니다. 꾸어주는 이유도 이자를 받아 챙기려는 목적이 다분합니다. 반면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되돌려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꾸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돈이 더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들은 그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가난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사회적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의 형편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을 베풀 때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베푸는 자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다시 오실 때 의인들의 부활시키시고 그들의 선행과 헌신과 희생을 갚아 주십니다(14:13-14).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십니다(잠 19:17).
가난한 사람에게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꾸어주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것은 그들을 더 의존적으로 만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돈을 꾸어주는 문제는 사회 제도를 통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개인회생 제도는 파산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이 최소한 인간의 존엄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며 그들의 자활을 돕는 프로그램입니다. 인간의 제도가 허점이 있지만 이런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지혜롭게 개인 파산 문제를 도와주는 것은 현명한 일입니다.
교회에서도 구제헌금을 통해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돈을 꾸어주는 일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마음으로 꾸어줄 때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상대방이 돈을 갚지 못할 때 꾸어준 사람은 마음 한 구석에는 섭섭한 마음과 정죄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성도들 간의 돈 거래는 다툼과 소송과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사적으로 금전 거래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영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빚은 죄에 비유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의 피로 대가를 다 치르시고 우리의 죄의 빚을 갚으심으로 우리를 값없이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죄의 빚을 갚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저 받았으므로 거저 주어야 합니다(마 10:8).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 그가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음 6:35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하늘의 사랑을 기대하라
예수님은 35절에서 “사랑하라”, “선대하라”, “꾸어 주라”는 세 개의 동사를 사용하여 32-24절을 다시 요약하셨습니다. ‘꾸어 주라”는 말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라는 분사구문을 덧붙여서 자기 희생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문장은 모두 제안이 아니라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지와 선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인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벧후 1:4). 이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활력을 공급해 주셔야 하고 우리는 성령님을 지속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원이 충만할 때 이 명령에 기쁘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44-45은 좀더 구체적인 실천의 내용을 제시해 줍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입히려는 사람들이 부당하게 우리를 대할 때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원천은 악인과 선인에게 차별 없이 해를 비추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차별 없이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마 5:45). 우리는 이 사랑을 기도라는 수도관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수준이 너무 높고 실천하기에 너무 힘들다고 포기하지 않고 순종하고자 할 때 우리 내면에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이 아직 거저 주시는 은혜의 날이고 자비의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선한 자와 악한 자 사이를 갈라놓을 심판의 시간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가 심판대에 올라 의인과 악인에게 각각 다른 몫을 줄 때가 올 것입니다.우리가 다른 사람 때문에 기분이 상했을 때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말고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늘에서 받을 보상은 클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는 자였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며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엡 2:1-5). 우리가 이 은혜를 생각하면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는 구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를 가리켜 “일반은총”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베푸시는 축복으로 나타납니다. 일반은총은 선택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구별되어야 하지만(렘 31: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반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일반은총은 인간의 영적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일반적인 축복을 말합니다. 많은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차별 없이 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 가리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인 유익을 주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성품을 안다면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들에 대해 악감정을 가질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은총인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31절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황금률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2-35절에서 더 나아가셨습니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하지 않을지라도 그들에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다가 지친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여러 가지 섬기는 일을 하다가 탈진이 되는 경우도 있고 인간 갈등으로 인해 교회 공동체에서 어울리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서로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선을 선으로 갚도록 노력해야 하며 남이 우리를 섬길 때 우리도 남을 섬겨야 합니다. 이것 또한 우리 주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격려와 칭찬과 인정을 바라는 마음이 우리의 선한 일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고 격려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기대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다면 우리는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섬기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긴다면 오래지 않아 소진될 것입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과 격려는 근본적으로 우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기대는 곧 오해와 실망으로 바뀔 것이고 섬기는 동력은 곧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상을 바라고 기대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꾸어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답게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그의 사랑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6:36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하나님의 자비의 수준까지 이르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원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마치셨습니다. 원수들은 우리를 모욕하고, 학대하며, 빼앗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영적인 무지를 인지하고 그들에 대해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의 탁월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한 지혜롭게 갈등을 극복하며 부드럽고 친절한 말과 행동으로 응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와 의견을 같이 하지 않고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에 대해 마음을 열고 우리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감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선인이나 악인이나 구분하지 않고 보편적인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선을 행하면서도 사람들로부터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상을 바라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어떤지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같이 자비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비롭다는 것은 특히 고통을 당하거나 불우한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아들을 우리의 죄를 위해 죽게 하심으로써 자비를 보이셨습니다(요 3:16; 롬 5:10).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우리를 대적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배워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보류하시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심판을 보류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자비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불순종의 자식들이라는 것과 그의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공의로움으로 하자면 이 세상은 의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내어 주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이로써 그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불의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주셨습니다.
자비는 구약에서 자주 언급되는 하나님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십니다(출 34:6-7).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자기의 택한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가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십니다(신 4:31).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십니다(욜 2:13).
자비는 단순히 연민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고통당한 자들을 구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죄인을 향한 그의 아픈 감정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그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감성적이거나 이론적이거나 모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의 아들의 자기 포기와 자기 희생과 철저한 복종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구속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본받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비의 시청각 자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무엇인지 모호하지만 행동으로 나타난 신자의 자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삶을 산다고 해서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로서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더욱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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