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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과 정죄, 그리고 용서(누가복음 6:37)

예수님은 제자들이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것 대신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기본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이를 자각할 때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37

비판하지 말라

37-42절은 평지 설교의 세 번째 부분으로 하나님의 자비의 또 다른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비판과 정죄가 없고 은혜로 용서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는 삶을 통해 실현됩니다. 이 부분에서는 두 개의 금지 명령과 두 개의 긍정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금지 명령은 “비판하지 말라”와 “정죄하지 말라”이고, 긍정 명령은 “용서하라”와 “주라”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라는 구절은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도 잘 아는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학문의 발전은 비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21세기에 맞는 미래 인재를 키우기 위한 핵심 역량으로 비판적 사고(Crititical thinking), 의사소통 능력(Communication), 협업 능력(Collaboration), 창의력(Creativity),즉 4C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비판적 사고는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런 시대의 흐름과 역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판”은 “정죄”와 “용서”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비판의 금지는 상대방을 깍아내리고 자기의 의견이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 분별력을 갖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비판”과는 다릅니다. 성경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유일한 판단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시대로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런 주장도 옳고 저런 주장도 옳습니다. 성경에서 죄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논리와 느낌으로 괜찮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1:32이 말하는 대로 그들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합니다.

우리는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쳐야 합니다. 교육 현장에서도 옳고 그름을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이건 죄이다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설교에서도 죄와 심판에 대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위로와 평안의 메시지만 다루고 죄를 다루지 않으면 그 메시지는 죽은 메시지입니다.

복음이 왜 복음이겠습니까? 복음은 인간이 죄와 사망 권세에 포로로 있다는 비참한 현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도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에 기초한 것입니다(요 8:11). 예수님이 주고자 하시는 자유는 죄와 죄의 정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에게 쏟아 붓지 않고 예수님께 쏟아 부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라고 반문할 때 이에 대한 대답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였습니다(롬 6:1). 은혜를 더하려고 일부러 죄를 짓는다는 것은 우리 주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고 모욕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정죄와 판단은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가 은혜될 수 있고 복음의 메시지가 은혜롭게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개인적인 판단을 말합니다.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자기 경험과 습관에 기초해서 자기 편의대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이 적은 자는 말이 많은 자를 판단합니다. 말이 많은 자는 말이 적은 자를 판단합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 먹는 것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바울이 이방 선교를 할 때 유대인 크리스천과 이방인 크리스천 사이에 먹는 것 갖고 서로 판단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이에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 자를 감당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해결책을 제시하였습니다(롬 15: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롬 14:17). 

예수님께서 금지하신 것은 개인 기준으로 판단하여 판단과 정죄의 영에 사로 잡혀 일을 그르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우리는 일부 행동과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하지만 사람들이 무가치하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판단은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가 사실을 정확히 알기 전에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보는 것과 듣는 것까지도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편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쉽게 오해하고 오판하고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합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동기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또한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불신자를 신자인 것처럼 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비기독교인이 기독교인처럼 살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려고 하는 것은 역효과를 낳습니다. 친절하게 대하고,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랑을 소개하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아기를 키우듯이 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기까지 용납하고 배려하고 섬겨주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죄를 용납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회개하도록 해야 하고 완력으로 강압적인 방법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죄를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므로 우리는 한 영혼의 영적 성장을 위해 끈질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진실을 말해야 하고 성령께서 그를 책망하여 돌이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정죄는 내가 재판장이 되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죄인이기 때문에 사람을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정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죄인이 죄인을 심판하는 격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주로서 우리를 정죄하실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십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죄에 대해 눈을 감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서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대신 우리를 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정죄를 받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우리 죄를 대속하심으로 더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우리 내면에 역사하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다스리게 됨으로 우리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죄 대신 성령의 은혜의 역사를 믿고 용서하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판단기준으로 판단하거나 재판관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 대신에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아버지께서도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십니다(마 6:14-15).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해야 합니다(엡 4:32; 골 3:13).

바울은 그리스도의 모범에 호소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끈질기게 반역하고 그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인내하시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빚진 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갚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용서의 사랑을 갚을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용서함으로 갚을 수 있습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신이 철저하게 부패하여 도저히 소망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판과 정죄를 잘하는 매우 교만하고 공격적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죄악된 본성을 가진 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의 크기를 깨닫게 되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은 것은 일만 달란트로 1만년 동안 일해도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빚진 것은 고작 100데나리온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이 빚의 크기를 생각하면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용서는 어렵습니다. 용서는 인간의 능력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능력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하기 위해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의 상처는 아물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가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치료함을 받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에 상처를 안고 그대로 있다면 그 상처는 곪고 더 악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사 53:5). 

용서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잊는 것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내가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안보면 잊혀지다가도 마주치면 마음의 미움이 솟구칩니다. 때로는 미움의 감정이 분노로 이어지고 폭력적인 상황으로 발전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하나님께 용서의 힘을 주시도록 구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영접하고자 해야 합니다.  RT Kendall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랑은 선택입니다. 완전한 용서는 선택입니다. 적어도 처음에는 느낌이 아니라 의지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간직해 온 잘못의 기록을 찢어버리겠다는 선택입니다.” 

우리가 미움의 감정에 압도당할 때 우리는 나도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의 죄에 대해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용서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이 망가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할 때 우리의 영혼은 미움이 독이 퍼지고 그 결과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용서는 정죄하는 영의 반대입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예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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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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