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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의 말씀의 권위를 믿는 믿음(누가복음 7:4-10)

백부장은 병든 종을 위해 유대인 장로들을 보내어 고쳐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줄 만큼 유대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직접 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말씀만 하셔서 고쳐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백부장은 말씀의 권위를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7:4

이 유대인 장로들이 이방인 군사의 간구를 긍휼히 여기는 것을 보면 그들은 다른 유대인 장로와 다르게 예수님께 대한 존경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갔을 뿐만 아니라 열심과 간절함으로 간절히 간청했습니다 “간절히 구하다”는 말은 그들이 간청하기 시작했고 계속 간청했음을 나타내는 미완료 시제 능동태 입니다.

이 유대인 장로들은 백부장의 요청을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이 이방인을 위해 ‘중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백부장이 이방인이었지만 그를 매우 존경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합당하다”는 말은 맨 앞에 나오며 강조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백부장이 다른 로마 사람과 다르게 주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직접 다가갈 자격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군인이었고, 생명을 빼앗도록 훈련받았으며 아마도 생명을 빼앗은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에 대해 들은 것은 사랑과 형제애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끔찍한 죄인이었음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로마의 이방인이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이 싫어하고 거부하는 완전히 무가치한 존재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평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신을 깨닫고 자신의 죄를 갚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는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을 사랑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자기 비용으로 유대인의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백부장의 봉급은 일반 병사들보다 훨씬 높았지만, 이 백부장이 지역 회당을 짓는 것은 엄청난 재정적 희생을 의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 그를 이방인이라고 무시했지만 자기를 희생해서 유대인들을 사랑하는 그의 삶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백부장의 진심을 알고 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모든 면에서 그를 도와주고자 했습니다. 

누가복음 7:6

예수님은 백부장의 겸손한 간구를 들으시고 함께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자기 집에 오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고 전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그가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가는 것은 율법에 부정한 일입니다. 백부장은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로마 백부장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한 그가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을 유대 사회에서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거룩하신 예수님이 자격 없는 이방인의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수고하다는 말은 ‘괴롭히다, 곤란하게 하다, 지치게 하다’ 등의 의미로 은유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집으로 들어오시게 되면 이로 인해 율법을 어기는 일이 발생할 것이고 이로 인해 많은 곤란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했습니다. 처음에는 다급한 마음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보내어서 이 부분을 망각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자기 때문에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번에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아닌 벗을 보내었습니다. 벗은 아주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급하게 부탁하기 좋은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단순히 위대한 선생이나 위대한 선지자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무가치를 철저하게 인식하고 “주님, 저는 합당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백부장이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라고 추천했지만 백부장은 자신이 ‘합당하지 않은 사람’임을 고백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 비추어 자신의 가치를 측정하고 “나는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바울이“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쓴 것처럼 아무도 자신의 공로로 천국에 갈 만큼 충분히 선하거나 의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롬 3:10). 그의 말은 이사야의 말대로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사 64:6). 백부장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는 문제를 일으켜 불편을 겪게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말 한마디로 치유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 만큼 믿음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7:7

우리는 이 구절에서 백부장의 겸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백부장은 “당신이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겸손은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신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것, 우리 자신의 사악함과 부패함을 보여 주는 것, 인간의 본성이 완전히 타락했다는 것, 우리를 비천하게 만드는 것, 이것들은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역사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수많은 백부장 중 본문의 백부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그가 처음부터 인성이 좋고 인격이 완벽해서 그가 예수님을 이해하고 자기 발견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겸손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알았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부족함을 보았지만 그리스도의 모든 충족하심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거짓된 겸손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거기서 멈춥니다. 참된 겸손은 “그러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자입니다. 모세는 그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깨닫고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의 부르심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말하며 거절했습니다(출 4:10, 13). 이에 하나님은 모세를 향하여 노하시면서도 아론을 그의 대변인으로 세우시면서 그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셨습니다(출 4:14-15). 모세가 자신의 무가치에 머물렀을 때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백부장은 무가치를 인식한 것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능력의 차원까지 나아갔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믿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하인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아픈 부위에 손을 얹으셔야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비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급히 사람을 보내어 오셔서 나사로를 낫게 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지 않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사흘을 머무르셨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은 말씀만 하시면 고쳐 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시지 않아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나사로의 누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자기 종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7:8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의 근거를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생활에서 찾았습니다. 백부장은 군대 사회에서 권위의 원칙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권위 있는 자가 말할 때 그 말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는 사령관의 명령이 내려졌을 때 그 명령이 어떻게 이행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우주와 만물을 지휘하시고 다스리시는 영적 사령관으로 그가 명령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단순하게 믿었습니다. 그는 사령관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명령의 권위의 원칙을 영적인 세계에도 적용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직접 오시지 않더라도 말씀만 하시면 충분히 그의 하인의 죽을 병을 고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실 때 말씀으로 고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기 위해 화려한 미신적인 의식을 행하는 무당과 다르게 말씀만 하시면 귀신이 쫓겨나가고 그 어떤 병도 낫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그의 말씀의 권위를 사령관의 명령에 적용함으로 말씀 역사의 원리를 이해했습니다. 그는 탁월한 영적 감각과 재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실 때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알기 쉽게 가르치셨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의 밭이 어떠해야 함을 시각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누룩의 비유를 통해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팽창하는지, 반석 위에 지은 집의 비유를 통해 말씀의 기초 위에 인생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셨습니다.

백부장은 늘 열린 마음을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씀을 이해할 때에도 그의 경험을 군대의 명령 계통도를 통해 쉽게 이해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갖지 못한 놀라운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종의 병을 치료할 때 주님의 옷자락을 만질 필요가 없었고, 주님의 몸에 닿은 손수건이나 앞치마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도 충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종의 문제와 필요를 전적으로 주 예수님께 위임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 문제를 돌보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그 누구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독특한’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백부장과 같이 자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는 상속자 문제로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의 뭇별을 보여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그러자 아브라함은 우주의 광대한 세계의 신비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자연 세계의 신비로움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께 연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창 15:6).

마가복음 5:25-29을 보면 12년 간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원터치’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혈루증이 율법에 부정한 병이었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 몰래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옷깃만이도 만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믿음을 ‘소심한’ 믿음으로 치부할지 몰라도 ‘원터치’ 믿음은 그녀만 갖고 있었던 ‘독특한’ 믿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경험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그 사람만이 갖고 있는 ‘개인신앙’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뭇별을 보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은 것처럼, 12년을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진 것처럼, 이방인이었던 로마 백부장 또한 사령관의 명령의 힘을 영적 사령관이신 창조주 예수님께 적용한 ‘독특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과 같이 작지만 그 믿음은 산을 옮길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7:20). 믿음은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하지 않고 믿음을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작고도 독특한’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라고 고백하고 도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으로 은혜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예수님께 간구하는 믿음의 도전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을 감히 오라 말라 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닌 우주의 영적 사령관으로 생각하고 그의 명령의 힘을 단순하게 믿은 ‘독특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7:9

이 구절은 이방인에 대한 놀라운 찬양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해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돌이켜 따르는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여기서 “이만한 믿음”은 such great faith로 ‘이렇게 큰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큰 믿음’이 있으면 ‘작은 믿음’도 있는 것입니까? 앞에서는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작은 믿음’의 효력에 대해 기술했습니다. 믿음은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은 산을 옮길만큼 놀라운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여기서 ‘큰 믿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해 크게 실망하셨습니다. 특히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하고 그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따르지만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문제의 해결자로만 생각했습니다(요 6:26). 제자들조차도 귀신들린 아이 앞에서 쩔쩔매고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것을 보시면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7:17). 예수님께서는 믿음 없는 세대를 한탄하셨지만 본문의 백부장의 믿음은 이방인인데도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놀라운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이유는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백부장은 말씀에 기초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은 유대인들이 시기할 정도로 놀라운 믿음이었습니다(롬 11:13-14). 백부장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며, 불가능한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무리들은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을 것입니다. 백부장처럼 가족 중에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었거나 자신이 병든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니까 호기심으로 따라온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개인의 심각한 질병이 있어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은 의원에게 나아가듯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나아온 것이지 그를 믿고 나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대와 기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기대는 문제의 해결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가능성을 염두해 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전적인 의존을 말하며 오직 그분만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기도는 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소원 가운데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오직 그분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기록된 말씀과 약속을 믿으며 그 말씀을 붙들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로마의 백부장이 이런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도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었지만, 사려 깊은 배려, 예리한 통찰력, 뛰어난 겸손,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는 백부장의 믿음은 탁월하고 독특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강조하다 보니 인격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감동적인 인격을 동반합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하인을 향한 뜨거운 인간애, 상관의 명령에 따르는 순종의 자세, 예수님이 훌륭한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이 땅에 오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믿음, 그에 대한 복종과 경외심, 그의 경험을 기초로 영적인 세계에 접목하는 단순하고 재치 있는 사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한다고 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21). 기도할 때 부르짖기만 하며 응답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판기로 여기고 기도하면 무조건 결과물을 내어주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기록된 말씀에 기초한 믿음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의 사랑이 어떠한지 알고 그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 바탕을 둔 믿음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여러 번 “네 믿음이 너를 온전케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다른 사람이 “이처럼 큰 믿음”을 가졌다고 묘사한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믿음이 작다”는 표현을 5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마 6:30; 눅12:28; 마 8:26; 14:31; 16:8; 17:20). 한 번은 제자들이 예수께 그들의 믿음을 더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예수께서는 여러 번 그들에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말씀하셔야 했습니다(마 17:17; 눅 9:41). 

예수님께서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신 또 다른 예는 두로와 시돈의 가나안(수로보니게) 여인이었습니다(마 15:28). 이와 대조적은 수많은 이적을 목격하고 그 소문을 들었던 이스라엘은 정작 믿지 못하고 그를 불신하였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히브리서 11:1의 믿음의 정의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불신앙은 “내가 보면 믿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믿음은 “보든지 안 보든지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도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든 족속에게 열려 있습니다(골 3:11). 

백부장이 이런 믿음은 어디에서 생겼을까요? 그가 이 믿음을 가진 것은 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습니다(롬 10:17). 하나님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을 주십니다(7:3). 백부장은 분명 가버나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백부장은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자기 아들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요 4:48). 왕의 신하는 멀리 예수님께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씀하신 것을 믿고 집으로 가는 도중 그의 아들이 나음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백부장은 왕의 신하를 통해 그가 체험한 믿음, 즉 말씀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감동적인 믿음을 가지려면 주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큰 믿음을 갖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 예수님에 대한 더 높은 관점을 보여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말씀으로 인도하고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도록 그들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7:10

누가는 마태복음의 다음 부분을 빠뜨렸습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8:11-12). 마태는 모범적인 이방인의 믿음을 제시함으로 영적 혜택을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불신을 부각시켰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공간을 뛰어넘어 백부장의 종에게 미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세계를 존재하게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닙니다(히 11:3). 말씀으로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주 예수님은 멀리 떨어져 있는 종의 불치병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자 그 효력이 즉시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그에게로 되돌아오지 않고 그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그가 보낸 일에 형통합니다(사 55:11). 주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는 지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권위 있고 구원하는 말씀의 능력을 믿는다면 그의 말씀은 멀리까지도 미쳐 구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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