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요한에 대해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는 다른 선지자들과 달리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고 그의 길을 예비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선지자보다 훌륭한 자였습니다.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극히 작은 자이지만 세례 요한보다 큰 자입니다. 우리는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7:24-26
24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요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대상 세 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첫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이고 둘째는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며 셋째는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고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도 아니고 선지자인데 “선지자보다 훌륭한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흔들리는 갈대
이 연설은 ‘요한의 장례식 연설’이라고 불리도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갈대”의 이미지는 세례 요한이 주로 사역을 펼쳤던 요단강 갈대밭의 풍경에서 따온 것입니다. 갈대는 바람만 불면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약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요한은 비록 잠시 믿음이 흔들렸지만 흔들리지 않는 갈대는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강하고, 견고하고, 확고하기 때문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에 비유할 수 없습니다.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시대의 의견, 즉 현대의 사상에 흔들려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는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강조
예수님은 질문 형식으로 세례 요한의 성품과 업적을 강력하고 긍정적으로 대변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질문 형식으로 세례 요한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었다, 단순한 선지자가 아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러한 형태의 표현을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는 표현입니다(마 16:26).
그 외에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등이 있습니다.
세심하게 보시는 예수님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그의 충실한 종들의 성품을 세심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보낸 사람을 도로 보내시고 세례 요한의 명성을 지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변 사람들이 요한을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힘 있는 지도자를 원했기 때문에 그들은 요한이 그가 감옥에 있었다는 이유로 이제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무력한 사람으로 가볍게 생각하기 쉬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의심이 섞인 질문을 던진 것으로 그의 강직함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는 따뜻하고도 강한 어조로 감옥에 갇혀 있는 그의 친구의 삶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흔들리고 불안정한 성격이 아니며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님을 강한 표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변덕스럽고, 분별력이 없고, 흔들리는 기회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요한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라고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7:25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
예수님이 두 번째로 제시한 세례 요한에 대한 이미지는 그의 삶의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보러 광야로 나갔느냐고 물으심으로 그가 검소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은 백성의 삶과 동떨어진 사치스럽고 권력이 있는 왕이나 귀족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고 하심으로 세례 요한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강조하셨습니다.
왕궁에 있는 사람은 헤롯입니다. 그는 온갖 사치를 즐겼고 그의 권력으로 동생의 아내를 빼앗고 부도덕한 삶을 살았습니다. 유대인 가운데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정치와 결탁하여 권세를 누려온 제사장들입니다. 또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바리새인들도 종교적 권력을 누려왔던 자들입니다.
반면 요한은 제사장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살면서 낙타 털옷에 가죽띠를 묶고 살았습니다(막 1:6). 요한은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고 자신을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존경과 인기를 받았지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죄에 도전했고 굴곡진 사람들의 마음을 평탄하게 하며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의 길을 닦았습니다.
삶이 전하는 메시지
사람들은 이런 요한의 삶과 그가 전하는 메시지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영적인 빈곤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는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고 가난하고 헐벗은 낮은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부드러운 귀족의 옷을 입고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메신저의 화려한 말 기술에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메신저의 삶에서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삶이 따르지 않는 설교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값비싼 옷을 입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성도의 섬김을 받는 것을 즐기는 목회자들의 화려한 삶은 그가 전하는 복음 메시지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7:26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한 세 번째 이미지를 제시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광야로 나가 보고자 한 사람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고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나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도 아니라 “선지자”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출현한 것은 말라기 이후 약 400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마카비서와 같은 신구약 중간기에 해당하는 기록은 있지만 말라기서와 신약성경 사이에는 영감받은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말라기 이후 400년 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백성들은 말씀이 없는 시기에 영적인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이는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 8:11-13).
그런데 유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영적 기갈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그의 회개의 메시지를 듣자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드디어 그의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찬양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이은 선지자
그러나 그는 단순한 선지가 아니라 “선지자보다 훌륭한 자”였습니다. 그가 어떤 점에서 선지자보다 훌륭한 자일까요? 그는 말라기가 예언한 대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선지자였습니다(1:17). 그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고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3:4). 그는 구약과 신약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 선지자로 구약의 다른 그 어떤 선지자보다 훌륭한 선지자입니다.
그가 훌륭한 선지자가 된 이유는 그가 많은 일을 하거나 남보다 뛰어난 인격을 가진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탁월함은 그의 사명에 있습니다. 그가 받은 사명은 하나님이 주신 일방적이고 주권적인 은혜였습니다. 그의 사명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가까이서 본 증언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요 1:29). 그는 모든 선지자들이 보기를 간절히 원했던 메시아를 직접 보고 증언한 자였습니다.
누가복음 7:27
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구약성경에 예언된 선지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구약의 선지자와 차별되는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가 구약성경에 예언된 선지자라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주로 다루었지만 선지자가 등장할 것이라는 예언을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와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아의 선구자가 등장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사 40:3; 말 3:1). 이런 점에서 세례 요한은 다른 선지자와 구별됩니다.
또한 다른 선지자들은 예수님에 관해 예언했지만 예수님을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의 눈으로 메시아를 보았고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또한 그가 하실 일을 구체적으로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실 것을 외쳤습니다(요 1:29). 그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을 말하였습니다(마 3:11; 막 1:7-8; 눅 3:15-17). 그는 예수님이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마 3:12; 눅 3:17).
또한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구속 역사의 바톤을 예수님에게 넘겨준 선지자였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신 장면에서 잘 드러납니다. 요한이 세례를 베풀자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마 3:16-17; 막 1:10-11; 눅 3:22). 이는 메시아의 대관식이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요한은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라기 3:1을 인용하여 말라기가 예언한 선지자가 세례 요한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요한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 동시에 요한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사람들을 준비시켰습니다.
누가복음 7:28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다른 선지자들과 비교하셔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칭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났다
“여자에게서 태어났다”는 표현은 세례 요한이 인간이라는 의미의 동의어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이 비교에서 제외되었다고 가정했습니다. 세례 요한보다 예수의 훨씬 더 크고 위대함은 누가복음 1-2장에서 반복되는 주제였습니다(1:26-38). 누가복음의 독자들은 예수가 요한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비교는 요한과 다른 인간들 사이의 비교였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지극히 작은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는 연령으로 볼 때 “더 어린 자”라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세례 요한보다 어렸지만 더 위대한 예수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첫 번째 해석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세상의 생각으로는 세례 요한은 정말 훌륭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가 가장 큰 선지자보다 큽니다. 이 구절을 세례 요한을 비하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 요한의 특권
예수님은 요한이 시대를 가로지르는 다리이자 새 시대의 하나님 나라를 열었던 인물 중에 매우 큰 역할을 한 선지자이기 때문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문을 연 하나님 나라와 겹치지만, 여기서 그는 구약의 마지막 위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요한은 실제로 그의 눈으로 메시아를 보았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을 성취하는 일에 친히 참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한 일이 위대하다는 것보다는 그의 위치가 얼마나 위대하냐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어떤 선지자도 메시아의 선구자가 되는 특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더 나은 성품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소개하는 그의 독특한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 즉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 전에 온 모든 선지자들 중에서 요한의 위대함은 메시아 예수의 직접적인 선구자로서의 그의 역할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께서 선포하고 실현시키신 하나님의 왕국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구약 제도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신약 시대의 신자의 특권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 즉 예수님을 믿고 새 언약 나라에 들어간 자가 요한보다 큰 자입니다. 요한 이후에 오는 자들은 예수님의 강림 후의 성취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은 옛 시대와 새 왕국 시대의 시작 사이의 질적 차이를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가장 잘 교육받은 구약 신자의 종교적 지식과 신약에 익숙한 신자의 지식 사이의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청동거울을 통해 사물을 보듯 복음 진리를 희미하게 보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된 복음 진리를 정오처럼 분명하게 보고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친숙함
복음에 대한 우리의 친숙함은 우리의 특권에 대해 무감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영광스러운 진리들이 온전하게 드러났는지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분의 피가 흘려지기 전에는 드러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약속의 진리를 우리는 지금 누리고 있음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과 바울의 희망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였으며 동일했습니다. 둘 다 한 성령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둘 다 그들의 죄를 알고 있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이 사도 바울처럼 구원의 길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둘 다 같은 믿음의 대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것을 멀리서 보았고 일반적으로 묘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바울은 그것을 가까이에서 보았고 그의 희망의 이유를 특별히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지식의 열쇠를 가진 신자
십자가의 이야기를 아는 “지극히 작은 자”인 우리는 족장들과 선지자들이 결코 누리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의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신약을 사는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이지만 이미 기록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알고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아는 특권을 가진 자임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고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습니다(히 11:13).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희망하면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을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다 성취된 후 체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비밀을 아는 자라 특권을 가진 자입니다.
기록된 계시의 말씀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된 계시의 말씀 이외에 추가적인 다른 것을 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의 말씀으로도 충분합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것을 추가하거나 빼는 것은 그의 말씀을 무시하는 교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언제 어디서나 성경을 열면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추이게 됩니다(시 119:130).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기 위해 모세처럼 시내 산에 오를 필요가 없고 엘리아처럼 호렙 산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책상에 앉아 그의 말씀을 열면 하나님이 바로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그의 말씀을 읽기 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여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준한 우리 마음을 깨닫게 해주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에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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