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잡수실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예수님의 발치로 다가와 향유를 붓고 눈물로 발을 적시며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 행위는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경배한 행위였습니다.
누가복음 7:36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한 바리새인의 초청에 응하신 예수님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이 식사 초청은 아마도 안식일에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랍비들은 회당 회당 예배가 끝난 후 설교를 한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것을 덕으로 여겨습니다(막 1:29-31). 이 초청이 연회 식사였다면 예수님은 선지자로서의 명성 때문에 초대되었을 수 있습니다. 초청한 바리새인은 언뜻 보기에 친근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거나 그를 고발할 어떤 이유를 찾으려고 하였습니다(39). 이 만남은 친근한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른 불순한 동기로 예수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을 위해 기꺼이 승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 의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리셨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보다 더 악한 바리새인과 기꺼이 식사를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의 말씀처럼 그의 포용력은 끝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여러 가지로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람이 만든 안식일 규례를 어기신 것을 따졌고( 눅 6:2 ),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자 그들이 분노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의논하기도 하였습니다(6:11). 예수님은 그 사람이 자신에게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유죄 판결의 증거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초청을 수락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위선자의 집에 기꺼이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은혜로우시며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고, 이 사악하고 위선적인 바리새인조차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차별하지 않고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초대에 응하신 것은 이 기회를 통해 그가 어떤 분이심을 나타내고자 의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마 그들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말하면서 비난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이 바리새인에게 영적인 교훈을 가르치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집에 잘 차려진 식탁 침상에 앉으셨습니다. 여기서 “앉았다”는 말은 recline으로 ‘비스듬히 기대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침상에 몸을 눕힌 채로 엎드려 기대면서 식사했습니다. 발은 매우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식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유복한 사람들의 집 안에는 사각형의 안뜰이 있었습니다. 종종 안뜰에는 정원과 분수가 있었습니다. 초대한 주인은 손님의 어깨에 손을 얹고 평화의 입맞춤을 했습니다. 당시 거리는 먼지가 많았고 신은 샌들이었기 때문에 외출하고 집에 오면 발은 항상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종을 시켜 손님의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주인은 또한 달콤한 냄새가 나는 향을 조금 태워 냄새를 없애고 머리에 향유 몇 방울을 떨어뜨려 좋은 향기로 상쾌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식사에 초대된 손님은 침상에 누워 왼쪽 팔꿈치에 기대어 오른팔로 음식을 집어 먹으며 발은 뒤로 뻗었습니다. 식사 중에 샌들을 벗었습니다. 식사 자리에는 3개의 테이블이 U자 모양으로 놓여졌고 종들은 트여 있는 곳으로 음식을 가져와 테이블에 놓았습니다.
누가복음 7:37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죄를 지은 한 여자
37절은 “그리고 보라(And, behold)”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독특한 장면을 주목하라고 함으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은 다른 모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6:6-13; 막 14:3-9; 요 12:2-8). 그런데 각 사건은 두드러진 차이점을 보입니다. 누가는 초청한 바리새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이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즉, 초청한 사람도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와 요한은 향유를 부은 사건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기록했지만 누가는 갈릴리 사역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했습니다. 또한 마태와 마가와 요한은 이 사건이 유대 지방의 베다니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했지만 누가는 ‘향유 사건’이 갈릴리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향유를 부은 여자를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로 소개하였고, 마태와 마가는 “한 여자”로 소개하였지만, 요한은 이 여인이 마르다와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향유를 부은 곳도 차이를 보입니다. 누가와 요한은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고 되어 있고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아무리 그럴듯하게 엮어보려고 해도 모순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의 오류일까요? 복음서는 서로 다른 독자들을 대상으로 서로 다른 맥락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저자는 대상 독자의 관심사와 관심사에 공감하도록 내러티브를 조정했을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스토리의 세부 사항이 변형되어 특정 청중에게 더 관련성이 있거나 강조점이 부각될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서에 기술된 사건들은 처음에는 기록되기 전에 구전을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이야기가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달됨에 따라 기억, 강조 또는 문화적 맥락의 차이로 인해 다시 말하는 데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복음서 필자들이 기록을 작성할 때 구전 전통의 요소를 그들이 이해한 대로 통합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차이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저자가 의도한 대로 문맥 속에서 해석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는 이 여인을 흥미롭게도 “죄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 여인을 “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말한 것과 연관지어 기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만든 규칙과 예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죄인으로 지목했습니다. 반면 자기들은 이를 잘 지킨다고 해서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결코 자신을 “죄인”이라는 낮고 천한 범주로 분류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에게 죄 인식과 죄 사함의 은혜의 관계에 대해 교훈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라고 하심으로 죄 인식과 죄 사함의 은혜의 관계가 비례관계임을 말씀하고자 하셨습니다(47).
본문은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하였는데, 이는 KJV에서는 a woman in the city, which was a sinner로 ‘도시에 사는 죄인인 여자’라는 뜻입니다. 해설자들은 그녀가 일반적으로 저렴하지 않은 향수를 구입할 자금이 충분했다는 사실과 세리와 같은 범주의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 그 당시 누구나 다 인정하는 죄인인 매춘부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죄인”은 당시 타락한 사람들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용어였습니다. 당시 죄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여성은 창녀의 동의어였습니다.
향유 담은 옥합
옥합은 헬라어로 ‘알라바스트론’으로 향수나 마사지 오일을 담는 데 사용되는 작은 도자기 또는 유리 용기를 말합니다. 기원전 11세기경 고대 이집트에서 설화 석고로 조각한 용기로 시작되어 고대 그리스를 거쳐 고전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대부분의 알라바스트론은 몸통이 좁고 끝이 둥글며 목이 좁고 입이 넓고 벌어져 있습니다. 손잡이가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부 유형에는 귀 모양의 돌기나 구멍이 뚫린 돌출부가 있었습니다. 이 구멍은 줄을 끼워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습니다.
향유는 몰약(myrrh)이라고도 하는데 헬라어로 ‘뮈론’ 또는 ‘스뮈로나’입니다. 이는 ‘코미포라 뮈라’(Commiphora myrrha)라는 식물에서 생겨나는 방향성 수지입니다. 이식물은 아라비아 남부와 소말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북부 동부 지방이 원산지입니다. 수액 곧 방향성 나무진은 황갈색으로 덩어리를 이루며 아주 비싸게 거래되었습니다(계 18:11-13). 아마도 1년 치 임금만큼이나 비쌌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비싼 값에 수입해서 썼는데, 성직자(제사장, 선지자, 왕)의 위임식 관유로(출 30:23), 왕이나 귀족의 옷(시 45:8)이나 침상에(잠 7:16-17), 귀부인들의 휴대용 향 주머니로 사용되었습니다(에 2:12; 아 1:13). 이것은 이방 세계의 왕실에서는 여자들이 몸을 정결케 하는 물품으로도 사용하였습니다(에 2:12).
신약 시대 때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여 가져온 선물 가운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마 2:11). 로마 군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고통을 들어주려고 사용한 마취제(신 포도주)에도 몰약이 사용되었습니다(막 15:23). 또 시신의 부패를 막는 방부제로도 썼는데(요 19:39), 고대 이집트에서도 미라를 만들 때 몰약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떻게 죄인으로 알려진 여인이 만찬 장소까지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연회가 열릴 때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와 식탁에서 떨어져 서서 주인과 손님의 토론을 조용히 듣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게다가 식사 시간이 밤 시간이어서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손님이 발을 뻗은 상태로 자리에 있었고 식사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여인은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져왔습니다. 그 병은 귀한 향유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설화석고 병이었으며 목이 길고 입구가 막혀 내용물을 부을 때 깨뜨려야 했습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은 그녀가 제공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그녀를 익명의 상태로 남겨 두었습니다.
누가복음 7:38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은 여인
여성의 모든 행동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치에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발 아래에서 그녀의 구주께 경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자격 없는 자임을 알고 그녀의 죄에 대해 슬퍼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단순히 흐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흐느껴 울었고, 그녀의 눈에서 너무 많은 눈물이 흘러내려 예수님의 발을 흠뻑 적셨습니다. 본문은 그녀가 왜 울고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인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는 구절에서 이 여인은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녀가 흘린 눈물은 지상의 가장 순수한 시냇물보다 더 순수한 눈물이었습니다. 그녀의 울음은 자기의 죄에 대한 회개의 슬픔과 죄 용서에 대한 기쁨의 감정이 섞여 있는 울음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릿단을 풀었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공공장소에서 머리를 올려야 했습니다. 머리를 늘어뜨리는 것은 수치스럽고 무례한 행동이었습니다. 랍비들은 여자가 공공장소에서 이런 짓을 하면 이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께 감사하고 경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머리카락을 사용하여 그분의 더러운 발을 닦고 말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물 대신 눈물로 발을 닦았고, 수건을 대신해서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았습니다.
여인에게 긴 머리는 영광입니다(고전 11:15). 여자들은 자기의 머리털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꿉니다. 가장 좋은 샴푸로 머리를 감고 각종 영양제를 공급해 주어 풍성하고 고운 머리결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여인은 자기의 가장 귀중한 소유인 향유를 부어 드렸고 자기 신체의 가장 귀중한 것으로 구주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녀는 눈물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고 머리털로 닦은 후에 가지고 온 기름병을 발에 부었습니다.
나머지 손님들인 바리새인들은 그들 앞에서 펼쳐지는 이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악명 높은 여자가 들어와 선생님의 발 전체에 눈물을 뚝뚝 흘리고 몸을 숙여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눈물을 닦는 것을 보고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에 개의치 않고 자기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입맞추었습니다. 입맞춤은 사랑의 상징이며 사랑만이 아니라 복종과 예배의 상징입니다. 우상숭배자들도 그 우상에게 입을 맞추는 행위를 하는데 이는 경배를 의미합니다(호 13:2). 그녀는 시편 기자가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라고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 입 맞추었습니다(시 2:12). 그녀가 발에 입을 맞춘 것은 가장 높은 경외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주께 대한 경배였습니다. 그녀는 큰 죄인이었지만 지금은 죄에 대한 가장 깊은 슬픔, 그녀를 구원하신 은혜에 대한 가장 큰 사랑, 구주께 대한 겸손과 복종 등을 표현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사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에 휩싸여 눈물을 흘리며 구원을 주신 예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47절에서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완료형으로 이미 죄가 사해졌음을 말해 줍니다. 이 여인은 이미 죄가 사함을 받았지만 그후 예수님은 47절에서 그녀가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함으로 그녀의 죄 사함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죄 많은 여인’은 그녀의 ‘많은 사랑’ 때문에 그녀의 ‘머리털’과 그녀의 ‘보배로운 향유’를 그분께 바쳤습니다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헌신과 희생을 동반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희생시키심으로 죄인에 대한 그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8). 그녀는 사랑하는 마음이나 말에 그치지 않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행위로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드려 영광을 돌리고 예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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