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으로 세 가지를 예로 드셨습니다. 그것은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입니다. 염려는 우리의 영적 관심을 분산시킵니다. 재물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에 우상처럼 숭배합니다. 향락은 우리를 중독에 빠뜨립니다. 우리는 이런 가시떨기를 제거함으로 좋은 마음 밭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8:14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어느 정도 자라지만 가시 기운에 막혀 결국 결실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 가시를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떨기가 있는 마음 밭은 분열된 마음이나 집착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가시는 신앙 생활의 장애가 되는 요소를 말합니다. 가시는 번식력이 좋기 때문에 식물이 자라는 데 필요한 모든 영양소를 빼앗아갑니다. 영양소를 빼앗긴 식물은 열매를 맺을 영양소가 없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습니다.
염려의 가시
첫째로, 이생의 염려는 결실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생의 염려는 ‘불안, 걱정, 근심’입니다. 이는 신뢰의 반대말입니다. 신뢰는 믿음의 뿌리이며 염려가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영적인 삶을 질식시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염려는 안 생길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염려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해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염려한다고 해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심으로 염려의 무익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중을 나는 새와 들에 피는 백합화를 예로 들어 하나님께서 다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먹고 입고 사는 의식주의 문제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하늘 아버지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마 6:32). 그러므로 제자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마 6:33). 삶의 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영적으로 질식당합니다. 걱정은 우리의 시간과 활력을 소진시킵니다.
걱정은 불신의 산물이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리하게 하고 말씀의 씨가 성장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걱정은 가난한 사람들의 재앙일 수 있지만 부자라고 해서 이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부가 더 많은 걱정거리를 생산해 냅니다.
이생의 염려는 우리를 세상일에 집착하게 하고 몰두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향할 마음을 빼앗아 갑니다. 이 세상의 일은 이 땅에서 우리의 실제 삶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그것에 집착하고 몰두하게 합니다. 우리는 실제 삶에서 이 염려를 완전히 없앨 수 없습니다. 염려는 자연스럽게 생기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생의 염려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염려의 문제가 생기면 그 염려 자체에 얽매이고 집착하여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반면 우리는 염려의 문제를 통해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간구하도록 하셨습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그들은 염려의 가시에 찔려서 사랑과 정직, 인내와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염려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탐욕과 사치, 물질주의의 세상 가치관에 영향을 받아 믿음의 씨가 자라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들은 이생의 염려로 인해 늘 긴장하고 기쁨과 평안을 잃고 원망과 불평을 일삼으러 결국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비교 의식으로 세상에서 잘 나가는 다른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이런 시기심 때문에 공평하신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본분을 잊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염려 때문에 안식을 잃고 지치고 망가지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염려를 극복하는 길은 자족하는 법을 배우고 감사하며 기도함으로 염려의 짐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라고 권면하였습니다(벧전 5:7).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권면했습니다(빌 4:6-7).
재물의 가시
둘째로, 재물의 가시는 결실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돈을 사랑할 때 신앙생활 자체가 부담스럽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돈을 가져도 인간은 탐욕 때문에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재물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고 재물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재물은 사용하기에 따라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데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물이 이기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될 때 그것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협하는 올무가 됩니다.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게 하는데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다고 말했습니다(딤전 6:9-10).
돈을 사랑한다는 것을 돈을 최고의 보물로 여기고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신으로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은 많은 것을 줄 것처럼 약속합니다. 지속적인 즐거움과 편안함, 권력과 명성과 장래의 안정감을 줍니다. 그는 돈이 사람의 행복의 원천이요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열쇠가 된다고 믿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 중에서도 자기 소유를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드리고자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반대로 돈이 없어도 돈을 사랑하는 사람 또한 많습니다. 그들은 돈에 한이 맺혀 양심을 팔고 돈을 얻고자 처절하게 노력합니다. 그들은 돈을 벌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물욕이 지배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물질 숭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 가치는 돈과 번영을 약속하는 거짓 종교입니다.
사람이 부요해지면 더 많은 소비를 추구하기 때문에 만족이 없습니다. 부자가 될수록 생활 운영 비용이 증가합니다. 육신의 만족은 인플레이션이 있습니다. 한때 미국의 꿈(American Dream)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이 이 꿈을 안고 미국에 이민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만큼 풍요로움을 지탱하기 위한 비용이 늘어나 부부가 바쁘게 일해야 풍요로운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가난해졌습니다.
부를 추구하다 보면 더 많은 돈이 필요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일해야 하는 끝없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부자는 늘어난 지출을 따라잡기 위해서 더 바쁘게 일하고 더 여유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더 인색해지게 되고 자기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메말라가는 줄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이 없어서 작은 것에도 만족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누립니다. 그러나 부자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그 소유로 인해 염려가 많아지게 됩니다. 그들은 경제 상황에 매우 예민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주식 변동이나 환율 변동에 따라 그들의 재산가치가 요동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소화 능력은 제한이 있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 있어도 일정량을 먹으면 더이상 먹을 수 없습니다. 식탐 때문에 더 먹게 되면 소화가 안되고 배탈이 나거나 잉여 칼로리가 살로 가게 되어 비만하게 되고 그 비만은 건강을 망치게 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구도 일정량 이상을 넘어가게 되면 영적으로 비만하게 되고 영적인 건강을 망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재물을 추구하고 그것을 잡고자 추격전을 하고 있다면 그만 두어야 합니다.
돈은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문제를 안겨줍니다. 행복의 열쇠는 더 많이 얻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유익을 위해 덜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요 6:27).
향락의 가시
셋째로, 향락은 우리를 결실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세 번째 가시는 ‘향락’입니다. 향락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향락을 배제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서 기자가 말한 대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바람을 쫓는 것과 같습니다. 느낄 수는 있지만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여기 있다가 사라집니다. 세상 쾌락은 매 순간이 지나갑니다. 세상 쾌락은 중독성이 매우 강하여 쾌락에 얽매이게 합니다.
이것에 관해서 성경뿐만 아니라 과학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쾌락에 집중하면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고 ‘쾌락의 러닝머신’이라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쾌락에는 중독성이 강해서 우리로 즐거움에 대한 욕구가 점점 강해지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빈 공간을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만이 진정한 참만족을 줍니다. 우리는 세상 쾌락이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 안에서 그가 주시는 기쁨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양을 생명을 얻게 하고 더 충만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요 10:10).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육 간에 풍성한 삶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목마르고 주린 삶을 삽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처럼 사람들은 영적인 기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기근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입니다. 그들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합니다. 말씀이 없을 때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집니다(암 8:11-13).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죄 사함과 구원을 약속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인해 생긴 목마름을 만족시키며 더이상 목마르지 않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통해 돈 없이, 값 없이 성령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텅 빈 마음에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영적인 즐거움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주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면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게 됩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맺으신 영원한 언약입니다(사 55:1-3). 우리는 세상이 주는 쾌락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과도한 기대를 하지 않게 될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 자족하고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작물과 가시덤불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가시덤불이 작물을 질식시켜 고사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소원과 세상적인 욕망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시소와 같습니다. 영적 소원이 올라가면 세상적인 욕망은 낮아지고 세상적인 욕망이 위로 올라가면 영적 소원이 낮아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미련은 가시가 되어 우리의 마음을 분열시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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