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1절의 가르침과 12-14절의 가르침은 둘다 식사 초대라는 공통된 주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7-11절은 초대받은 사람들의 자세에 관하여 말씀하신 반면 12-14절은 초대한 사람의 자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았을 때 분명이 여러 손님들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행동을 관찰하셨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높은 자리에 앉지 않도록 말씀하십니다. 1-6절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는지를 주시하셨지만 예수님은 높은 자리를 탐하는 그들을 주시하고 계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자기의 위선을 깨닫고 회개하고 겸손을 배우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끝자리에 앉으라
누가복음 14:7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예수께서 초대받은 손님들에게 비유를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3).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의 표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지 치열한 다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상류층의 저녁 식탁은 대부분 고전적인 직사각형 식탁에 의자가 있는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귀족들은 3명이 앉을 수 있는 소파에 기대어 식사를 했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잔치 자리의 윗자리는 그 잔치를 베푼 주인의 옆자리를 말하는데(막 12:39; 눅 20:46), 그곳은 영예로운 자리요 ‘좋은 자리’(약 2:3)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그곳이 영광의 자리로 간주되었습니다(눅 14:7). 헬라나 로마의 잔치나 연회자리에서 펼쳐지는 식탁은 ㄷ자형의 3면으로 배열되었는데, 유대인들도 이 식탁문화에 점차 젖어들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처럼 3면에 비스듬히 기대는 안락의자가 붙은 식탁을 ‘트리클리니움’(triclinium)이라 불렀습니다. 이 3면으로 된 자리 중 가운데 자리가 높은 사람들이 차지하는 자리였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는지를 주시하셨지만 예수님은 높은 자리를 탐하는 그들을 주시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자기의 위선을 깨닫고 회개하고 겸손을 배우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눈여겨보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마음의 동기까지도 다 아신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고전 4:5).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자신을 부각시켜야 합니다. 만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추려 한다면 그는 사람들에게 하찮게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드러냄으로 주목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자리에 초대를 받는지에 매우 예민합니다.
누가복음 14:8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8-9절은 해서는 안 될 일을 보여주는 예이고, 10-11절은 해야 할 일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예수님은 누군가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명예로운 자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이 위험하다고 알려주십니다.
혼인 잔치는 그 당시 유대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행사였습니다. 식탁의 좌석 배치는 공동체에서 자신의 지위를 나타냈습니다.사회적 지위는 고대에 중요했으며 연회에서 저녁 식사 손님을 앉히는 것으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런 문화는 팔레스타인 유대 사회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주인과 가장 가까운 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였고, 인정을 원하는 손님들은 그 자리를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오늘날은 공식적인 초대 자리에 자리표를 배치해 손님들이 자리 다툼하는 것을 방지합니다. 그러나 준비 과정에서 누구를 높은 자리에 앉힐 것인가에 대한 격렬한 논의를 거치게 됩니다. 초대받은 사람이 자기 자리가 서열에서 밀리게 되면 이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사람은 준비 과정에서 압력을 행사하여 높은 자리에 배치되도록 합니다.
누가복음 14:9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예수님은 청한 자가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자에게 더 뛰어난 사람이 그 자리에 앉힘으로 굴욕을 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더 높은 사람이 와서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때 그는 이마 다른 자리가 차지되어 있기 대문에 가장 낮은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오만의 길은 궁극적으로 부끄러움과 불명예로 이어질 것입니다. 반면 겸손의 길은 궁극적으로 보상과 명예로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대부분 사람들은 명예와 수치의 개념을 통해 세상을 이해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수천 년 동안 전해져 왔습니다. 당시 고대 이스라엘 문화는 명예와 수치에 기초한 가치관이 지배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어떤 것보다 명예롭게 살고 죽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세상적인 가치관과 정반대의 원리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위로 올라가고자 하면 내려간다는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라고 경고하셨습니다(눅 10:15).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역설 원리’를 자주 사용하셨는데,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예수님은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배부름을 얻을 것고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웃을 것이라는 역설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눅 6: 21).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과대평가하면 사람들에게 불명예를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멸시받는 세리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거만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옆에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였습니다. 그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자신은 죄인이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는 자는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9-14).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세상의 원리의 역전 현상이 일어납니다. 구원의 왕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교만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겸손하고 회개한 세리입니다.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십니다(시 75:6-7). 교만은 멸망에 앞서고,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에 앞장선다(잠 16:18). 교만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옵니다. 이는 뱀의 유혹에 빠진 아담에게 찾아왔고 계명을 어김으로 온 인류를 타락에 빠뜨렸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빼앗아 자기가 받고자 하는 악한 본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알고 교만하지 않도록 자신을 낮추기를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해야 합니다(롬 11:20).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집니다(고전 10:12). 교만한 사람은 오르는 것을 좋아하며 우리의 대적 마귀는 이런 사람을 돕기 위해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높이가 높을수록 넘어짐은 더 치명적이고 두렵습니다.
우리는 은밀한 교만의 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근원의 뿌리가 항상 자리잡고 있는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 앞에 날마다 나아가 교만을 회개하고 겸손한 마음을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특히 은사, 성취 또는 특권을 소유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자기를 높이는 마음은 파괴적이며 유일한 보호책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10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청한 자가 와서 높은 자리로 안내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앞으로 높임 받을 것을 가정하고 가장 낮은 자리를 찾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먼저 최악의 자리를 선택함으로써 어떻게 첫 번째 자리에 앉을 수 있는지에 대한 전략을 알려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로 올려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은 여전히 교만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가장 낮은 자리가 자신에게 적합한 자리라고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적절한 위치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모든 일에서 가장 좋은 길입니다. 지위는 다른 사람들이 제안해야지, 스스로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거짓 겸손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교만함만큼이나 하나님께 미움받습니다. 하나님은 사회나 교회에서 우리의 지위에 감명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무엇을 말하거나 생각하는지에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동기를 보시기 때문입니다(삼상 16:7).
예수님은 비유에서 청한 자가 끝자리에 앉은 자에게 “올라 앉으라”라고 하며 그를 높일 것이라고 하십니다. ‘끝자리로 간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복음을 영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한 사람입니다.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를 깊이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인정하고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는 ‘의롭다 함을 받음’이라는 은혜로운 영예를 얻습니다. 이는 일시적인 삶뿐만 아니라 곧 다가올 삶에서 영원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영광이 있으리라”는 구절은 대부분의 영어 번역에서는 ‘will be honored’(영예를 얻게 될 것이다)로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 영예가 자기의 성취로 되는 것이 아닌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게 될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에게서 끝자리에 앉고자 하는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의 자기 사명을 발견하고 철저하게 겸손한 삶을 살았습니다. 소리는 메시지만 전달할 뿐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그는 당시 수많은 인기를 얻었음에도 사람의 영광을 부인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그가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조사단을 보내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그리스도인지 알고자 했을 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네가 엘리야냐?’라고 묻자 그는 “나는 아니라”라고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또 “네가 그 선지자냐?”라고 묻자 그는 더 짧고 단호한 어조로 “아니라!”라고 더 강력히 부인했습니다(요 1:19-23). 그는 사람들의 관심에 자기에게로 쏠릴 때 그 관심을 예수님께로 돌렸습니다. 그는 그 뒤에 오시는 분을 소개하면서 자신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는 미천한 존재임을 고백했습니다(요 1:26-27). 그는 예수님이 등장하시자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께 향할 수 있도록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예수님이 무대에 등장하실 때 세례 요한의 제자는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간다고 보고함으로 위기의식을 드러내었습니다. 이때 그는 예수님을 신랑에 비유하고 자신은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는 신부를 취하는 신랑을 보는 기쁨이 충만하다고 고백했습니다(요 3:29). 세례 요한은 이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자기의 사명을 다하고 역사의 무대로 사라질 준비를 하였습니다(요 3:30). 그는 결국 헤롯 왕의 죄를 책망한 일로 감옥에 갇히고 참수형을 당함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높여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칭찬하시고 그를 높이셨습니다(마 11:11).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자기 자신의 탁월함으로 드러냄으로 칭찬과 영광을 받고자 합니다. 겉으로는 “저는 아무 것도 아니고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과 칭찬을 즐기는 ‘미묘한 자존심’을 내세우고자 합니다. 겸손의 말로 끝자리로 가고자 하지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기 만족, 자기 계획, 자기 욕심이 앞서는 근본적으로 악한 본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만일 이를 제어하고 회개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끝자리로 가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높아진 곳에서 수직 낙하하는 비참함을 맛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위로 가는 길은 아래로 가는 길입니다. 가장 낮은 일을 하는 사람은 가장 높은 명예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고, 우리가 그분의 모범을 따라 사는 삶이 가장 영예로운 삶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자인가에 대한 주제에 매우 민감했습니다(9:46; 22:24). 그들의 서열 다툼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내내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에 대한 경쟁심이 매우 강했습니다. 그들은 주의 영광중에서 자기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시기를 청탁했습니다(막 10:37).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의 어머니가 청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0:20-21). 이에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습니다(마 20:24).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섬기는 삶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0:28; 막 10:45). ‘최고가 되기를 좋아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경건함을 해치는 것입니다(요삼 1:9-10).
은혜의 삶이 영혼에서 처음 시작될 때,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지만, 그것은 큰 두려움과 떨림과 함께 합니다. 죄를 의식하고, 그로 인해 겸손해진 영혼은 자신의 위치의 엄숙함에 압도당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의 은혜에 압도당한 자는 거짓 없는 수줍음으로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가 낮은 데로 처할 수록 우리는 더 높은 곳으로 부름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은 신성의 찬란함 가운데를 걸으며, 영광스러운 천사(케루빔)처럼 얼굴을 가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의로움이라는 두 날개를 가지고, 경건한 마음으로 고개 숙여 보좌에 다가갈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랑과 선함과 자비의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언약적 특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엎드려 있는 동안,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사랑의 현존에 대한 상쾌한 의식과 사랑하는 분 안에서 받아들여졌다는 깨달음으로 지탱될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은 더 높이 올라가라는 명령을 받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거룩한 확신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 “아빠,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는 특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스펄전).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11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높게 평가하는 자는 하나님의 평가에서 낮아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약 4:6).
성모 마리아는 갈릴리 촌 동네의 이름 없는 시골 처녀였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어느날 갑자기 천사로부터 그가 인류의 희망인 메시아를 잉태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성모로서 쓰임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녀는 아무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했습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눅 1:51-53).
이 말씀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은 자신을 쓰레기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오직 그리스도와 비교하고,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자신의 한계를 이해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은사와 강점을 인식하고,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기 자신을 내어 드리는 자입니다. 겸손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볼 줄 아는 냉철한 평가와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웃을 섬기려는 헌신입니다. 겸손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이를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겸손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 앞에 자기 자신을 낮출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 자신을 주의 말씀에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과 거룩하심에 두려워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겸손의 가장 위대한 모범이신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자입니다.
이 구절의 역설은 세상 사람들이 믿는 것과 완전히 반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빛내며 자기 영광을 취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자기를 광고하는 데 열심이며 어떤 일에 자기가 소외될 때 불 같이 화를 냅니다. 인간의 오만함은 이 기본적인 성경적 원칙을 비웃고 저항합니다.
“자기를 높이다”(exalt themselves)와 “자기를 낮추다”(humble themselves)는 모두 능동태로 인간의 자세에 해당합니다. 반면 “낮아지고”(be humbled)와 “높아지리라”(be exalted)는 수동태로 인간의 노력과 자세의 결과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처럼 우리는 자기를 낮추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높이는 일은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갖는 근본 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을 부인하고 낮은 데로 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힘쓰기 위해서는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비추어야 하고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임을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높이도록 유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열등감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죄로 인해 완전히 무가치하고 잃어버린 존재라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이를 발견할 때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은혜의 풍성함을 깨닫게 되고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발견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는 그의 은혜로 회복되고 하나님의 본래의 형상을 되찾게 되며 그 안에서 자라게 됩니다. 그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겸손한 자이며 이런 자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갖추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겸손한 태도를 보임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끼치게 됩니다. 헬라인들은 겸손을 부끄러운 상태로 보았지만, 우리 주님은 겸손이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필수적인 태도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이에 기초해서 역설의 결과를 주십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짐을 당할 것이고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가리켜 ‘신성한 수동태’라고 일컫습니다. 신성한 수동태는 예수님의 행복론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말씀하셨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라고 하였으며,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고 주리고 목마른 자를 채우시며 긍휼히 여기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13-14에서도 역설의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역설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역설은 인간의 노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깨닫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역설은 세상의 어떤 사람도 한 적이 없는 방식으로 그분이 보여 주신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이 역설의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가장 높은 분이 가장 낮은 분이 되셨습니다. 가장 능력 많으신 분이 가장 연약하고 무력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가장 부유하신 분이 가장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무한하신 분이 유한하게 되셨고 주인이 종이 되셨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은 이 역설을 기이하게 여기며 그 안에서 신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역설의 기이함을 탄성으로 고백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기적인 교만이라는 이 무서운 질병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죄로 여기고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이 시대의 악한 흐름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집착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완벽한 균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도록 권면합니다(롬 12:3). 우리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는 교만한 마음을 품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결코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해서 자학하거나 무기력에 빠지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시선을 향해야 할 대상은 나 자신이 아니라 겸손하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도록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 2:5-11). 그리스도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은 자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 자입니다(빌 2:2-4).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현재 시제로 겸손한 태도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지속적인 실천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능동태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우리의 의지의 선택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기꺼이 겸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에는 자기를 높이지 않고서는 영원히 무시받는 삶을 살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의 마음에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성육신하시고 섬기신 삶을 본받아 자기를 낮추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믿음을 통해 은혜로 손을 내밀어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붙잡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높임을 받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높임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허락하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높아지리라”는 약속은 지상에서 실현되는 약속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높임을 받을 것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높아지리라”는 약속은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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