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pring

성경 주석 종합, 성경 구절 묵상, 현대적 적용 주석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1-50)

요한복음 12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 중에서 세 가지 중요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사건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무리들의 환영을 받으며 왕으로 입성하신 사건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사건은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밀알의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후 요한은 유대인들의 불신의 문제를 다루었고 예수님께서 수난 주간 무리들에게 믿음과 영생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호소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건을 모두 자신의 죽음과 연관시키셨습니다. 밀알의 진리는 기독교 진리의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제자들이 따라야 할 영원한 교훈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헬라인들이 찾아왔을 때 밀알의 진리를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방인 가운데에서 맺게 될 비전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날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유월절 이틀 전의 일로 기록했습니다(마 26:2; 막 14:1). 장소도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하였고,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이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전에 이 사건을 기록했고 요한은 그 전에 있던 사건으로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장소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시몬의 집과 나사로의 집은 모두 베다니에 있었습니다. 1절은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도착했다고 되어 있지 않고 베다니에 도착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잔치가 있었던 장소는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신 것이고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가 그 잔치에 참석하고 있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시몬과 나사로의 가족이 어떤 관계인지 잘 모르지만 가까운 친지의 관계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시간적으로도 차이가 나는 것은 저자가 강조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향유 사건을 시간의 순서대로 기록하지 않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연관시키기 위해 삽입된 형태로 기록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유대와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보다 상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은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나사로의 가족들은 거기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의 사건과 연관시켜 볼 때 나사로의 가족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잔치를 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잔치는 종교 지도자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경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습니다(11:53). 나사로와 그 자매들과 그들의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은 이런 것을 인지했는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능력의 역사로 인해 새 생명을 얻어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여 예수님을 대접한 것입니다. 앉는다는 것은 recline으로 몸을 기울여 쉬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정식 식사나 잔치에서 몸을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대어 오른손을 움직여 음식을 편안하게 먹었습니다. 그래서 식사하는 사람의 머리가 왼쪽 손님의 가슴에 닿게 되는데 요한이 예수님의 품의 의지하여 누웠다는 것을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마르다는 열심히 음식을 만드는 일을 함으로 예수님께 감사의 표시를 하였습니다. 이 잔치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은 자 중에 있었습니다.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그런데 마리아는 독특한 방식으로 예수님께 감사를 표했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았습니다. 순전한 나드(spikenard)는 향기로운 황갈색의 기름으로 인도 북부 지역의 히말라야 지역에서 자라는 덩굴식물인 인동(honeysuckle)과에 속하는 나무에서 채취하였습니다. 이 기름은 전 세계적으로 오래 동안 향수와 치료제와 종교 의식에 사용되었습니다. 순전한 나드(spikenard)는 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 향수로 쓰이는 다른 재료에 순전한 나드를 섞어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했습니다(Wikipedia). 한 근은 로마식 무게 단위로 파운드(pound)로 NIV에서는 파인트(pint)로 번역했습니다. 이 분량은 12온스(ounce)로 340 그램 정도의 분량입니다. 그 가격은 300데나리온으로 노동자의 일년 품삯에 해당될만큼 값이 비쌌습니다(5). 이 향유는 되팔 수 있었기 때문에 여인들이 결혼 지참금이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에게 있어 이 향유는 개인적으로 그녀의 재산 목록 1호에 해당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것을 통째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상식적인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향유는 귀한 손님이 방문했을 때 환영의 뜻으로 한두 방울 떨어뜨려 예의를 갖추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비싼 향유를 한꺼번에 부어버렸으니 이는 지나친 행동임에 틀림 없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녀의 행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낭비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생각에는 대책 없이 부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쏟아 부어 버리면 그 다음에 어떻게 섬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조금씩 뿌리면서 대접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특히 살림에 밝은 여자들은 계산이 빨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신체에서 가장 낮고 지저분한 부분인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긴 머리털로 가장 지저분한 발을 닦았습니다. 여자에게 있어 긴 머리는 자기에게 영광입니다(고전 11:15). 여자들은 머리를 가꾸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입니다. 머리카락이 상할까봐 가장 좋은 샴푸와 린스로 머리를 감고 머리를 말린 후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에센스를 발라줍니다. 때마다 헤어 스타일을 바꾸어 기분을 전환하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긴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지저분한 발을 닦았습니다. 또한 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여인은 자기의 가장 좋은 것을 쏟아 붓고 여인의 영광이라고 하는 머리털로 가장 더러운 발을 씻겼고 종이 하는 일을 스스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고 예수님께 경배를 드린 것입니다. 마리아는 오라비인 나사로를 살려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그녀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그녀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님이 오셔서 그녀의 주가 되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였습니다. 그녀는 이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경배하고 섬겨야 할 분으로 대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드려 섬겨도 결코 아깝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우리의 경배와 찬양과 헌신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행동은 주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자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 줄 모르는 사람은 마리아의 행동을 비상적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리아는 남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께 마음을 드림으로 섬겼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용감하게 한 것 뿐입니다. 

인간에게는 예배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의 형상대로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세상의 헛된 것에 자신의 인생과 물질을 낭비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사람들은 텅 빈 내면을 채우기 위해 세상의 것들로 가득 채웁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은 터진 웅덩이처럼 다 새어나가버립니다. 그래서 그 무엇을 해도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세상의 만족 줄 것을 찾아 헤메다가 오히려 죄만 지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헛된 우상을 만들어 신으로 섬깁니다. 그러나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합니다(시 115:4-7). 사마리아 여자는 참된 경배의 대상을 찾지 못하고 남편을 통해 만족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5번의 이혼과 6번째 남자와의 동거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선지자임을 알고 예배에 대해 물었습니다(요 4:20). 이는 그녀가 예배할 대상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참된 예배의 대상이신 메시아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새 삶을 찾았습니다(요 4:21-30). 마리아도 예수님이 자기가 예배할 참 대상이심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린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발견하고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였습니다(빌 3:8,10-11). 마리아는 주 예수님보다더 귀한 것이 세상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귀한 향유를 드림으로 예수님이 그녀의 생명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했습니다.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마리아의 행동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제자는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6:8을 보면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유다는 이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낫다고 말했습니다. 1 데나리온이 일꾼의 하루 품삯이니까 300 데나리온은 일꾼의 일년 품삯에 해당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다른 제자들도 이런 유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오로지 유다에 대해서만 부정적으로 기술하였습니다. 요한은 유다가 멸망의 자식임을 강조하고자 하기 위하여 이렇게 기록한 것 같습니다. 공관복음은 제자도를 많이 강조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의 물질적 가치관을 드러냄으로써 향유를 부은 여인의 헌신을 배우도록 강조했습니다. 반면 요한은 처음부터 유다가 마귀의 자식임을 강조함으로 예수님께서 택하신 다른 제자들의 허물과 약점을 덮고 있습니다. 요한은 빛과 어두움, 생명과 죽음, 구원과 심판, 하나님과 세상의 이분법적인 접근을 강조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고 그들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요 10:28-29). 그러나 가룟 유다는 세상에 속한 자이고 마귀에게 속한 자로 예수님을 팔 자였습니다. 그가 가난한 자를 생각해서 그럴 듯하게 말하였지만 요한은 그가 도둑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일행의 재무를 맡은 자로서 공금을 횡령한 자였습니다. 그가 제자 생활하는 목적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재물에 있었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목적이 예수님이 아닌 다른 동기와 목적을 갖고 있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과 친분을 잘 쌓아 출세의 기회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듣는 맛에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교회에서 자기의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소개하지만 헌금 생활이나 교회 봉사에 매우 인색한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교회에 너무 미치면 안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마리아처럼 예수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답답하게 산다고 비난을 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동기는 나를 구원하시고 내게 영생을 주신 나의 왕, 나의 주께 예배하고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의 일부가 아니라 나의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세상에서 나의 할 도리를 간과하라는 말이 아니라 나의 실제 삶의 요소 하나하나를 예수님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질 중심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향유를 모두 드린 마리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 여인을 비합리적이고 낭비적이며 비효율적이라고 말합니다. 이 여인은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이익을 보려는 자본주의 세상에 맞지 않는 자처럼 보입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99마리의 양을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산으로 들로 찾아나서는 목자와 같이 미련하게 보입니다. 남은 99마리 양은 관리하는 것이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는 것보다 경제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시대가 오늘날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산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우리의 진심과 헌신을 다 받아 주시고 칭찬하시고 구원역사에 귀하게 쓰시는 분이십니다.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예수님의 마리아의 행동을 결코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만 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행동을 자신의 죽으심과 결부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행동을 예수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간직해왔던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임박한 죽으심에 대해 인지했다는 그 어떤 암시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향유를 부은 그녀의 행동을 자기의 죽음과 연관시키셨습니다. 미리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례를 위한 행동으로 해석하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처럼 예수님의 무덤에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미리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준비를 미리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구속역사와 연관시키시고 그녀의 헌신을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공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13). 마리아의 행동은 엉뚱하고 다른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습니다. 사실 그녀의 행동은 예수님께도 부담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만 두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예수님께 진심을 드리는 것에는 특정한 유형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섬기는 것이 옳고 저렇게 섬기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어떤 유형의 섬김이든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마리아의 행동이 지나치다라고 조금이라도 나무라셨더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는 방식에 있어 심적인 제약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드리고 싶어도 마음대로 드릴 수 없고 마음에 걸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 남을 의식하게 되고 마음껏 양심대로 자유롭게 섬기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데 있어 두려움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속량으로 원수의 손에서 구원함을 입었습니다(눅 1:68,71). 우리는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눅 1:75). 사마리아 여자는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도 예배 장소와 때에 대한 제약 때문에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녀에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4:21). 중요한 것은 예배의 방식과 장소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4:24).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그녀의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는 것은 그녀 나름의 예배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부담스러운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의 예배를 제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만 두어라”라고 하심으로 그녀의 진심을 모두 다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방식과 예의를 따지지만 예수님께는 예배하는 자의 마음의 자세를 중요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것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느냐,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섬기는 방식에 제한을 두셨더라면 그것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받으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섬기는 방식을 제한하지 않는 진정한 은혜의 시대를 여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진심을 다 받아줄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사랑을 주면 받는 사람은 부담스러워하고 거북하게 생각해서 피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담스러움을 표시하면 사랑을 주는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고 불신이 쌓여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사랑을 결코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시고 다 받아주십니다. 그것이 설령 상식에 맞지 않고 다소 엉뚱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좋게 해석해주시고 그의 구속역사에 연결시켜 주시고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도 다 다릅니다. 교회 내의 질서를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에 일정한 규칙이 있어야 하겠지만 “가만 두어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다양한 섬김의 방식을 수용하는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다양하신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형태의 헌신을 받으시는 우리의 참 경배의 대상이 되십니다.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말하는 가난한 자들 돕는 일은 그가 낭비라고 지적한 것에 대한 핑계에 불과합니다. 가룟 유다는 가난한 자들 도울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것을 볼 때 그의 마음에 조금의 자비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저 향유가 예수님에 발에 한꺼번에 부어지는 것이 아까울 뿐이었습니다. 그는 제자 그룹의 회계담당으로 돈이 넉넉해야 횡령한 돈이 그만큼 많아지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물질적이었으며 이런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늘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타락한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가난은 늘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찌보면 가난은 부의 공평하지 못한 분배로 생기는 것일지 모릅니다. 부자들은 자기가 가진 재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가난한 자들은 하루 벌어 어떻게 생존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존재하는 한 빈부의 격차는 늘 존재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늘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자에 대한 채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늘 그들 주위에 있지만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항상 그들과 함께 계시지 못하십니다. 33년간의 성육신의 기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은혜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창조주요 만왕의 왕이 되신 예수님께서 더럽고 냄새나고 추한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인간들 사이에 거하신 은혜스러운 기간도 이제는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마지막 사명인 대속의 과업을 이루셔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 예수님을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마지막 기간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최후의 운명을 의식하지 못했지만 온 마음을 당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성육신의 하나님께 경배하는 축복을 누린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즉시 하지 않으면 안될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처럼 온 마음을 당해 예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우리는 젊을 때 보통 자기의 미래의 안정된 삶을 위해 투자하느라 주님의 일을 미루고자 하기 쉽습니다. 좀 여유가 있으면 그 때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합니다. 당장 급한 불부터 끄고 나서 섬기는 일은 나중에 가서 생각해보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루고 나면 또 다른 급한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늘 있는 것과 같이 급한 일은 항상 나에게 다가옵니다. 어느 정도 충분이 돈도 벌고 자식도 다 키워놓고 한가한 중년의 끝자락이나 노년이 되면 그 때가서 섬기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노년이 되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기력이 없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9:4).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님(9-19)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소문이 이웃 동네와 예루살렘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만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아난 나사로를 보려고 왔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그 이유는 많은 유대인들이 나사로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라는 존재가 부담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죽이려는 그들의 계획이 틀어지게 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리들이 예수님 편에 서게 되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그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우려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기에 앞서 먼저 나사로를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그 이튿날”은 일요일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토요일 저녁에 베다니에서 나사로의 가족들과 가까운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 사이 사람들이 예수님과 나사로를 보려고 왔습니다. 일요일이 되어 유월절 축제를 보내려는 수많은 순례객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무리들과 합류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공관복음서에도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1:1-11; 막 11:1-11; 눅 19:29-38). 이 사건은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의 첫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를 떠나 감람산을 넘어서 벳바게 마을로 오셨습니다(막 11:1). 예수님은 거기서 어린 나귀 새끼를 빌려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요한은 공관복음서의 예루살렘 입성 과정에 대해 과감하게 생략하고 대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주민은 약 5만명 정도였는데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들까지 합하면 10~12만명 정도로 예상합니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270만명이 예루살렘에 있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거리는 순례자들로 가득차 있었고 축제 분위기로 인해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특히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뭔가 중대 선언을 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윗과 같은 왕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줄 구원자로 생각했습니다. 로마 당국은 유월절 행사를 유대인의 축제라고 해서 용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환영하면서 이 축제는 정치적인 성격으로 변할 위험이 컸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종교 지도자들은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들은 무리들의 환영이 로마에 대항하는 큰 민란으로 번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군인이 이를 진압하고자 예루살렘에 들어올 것에 대해 초긴장 상태였습니다. 만일 로마군의 진압이 일어날 경우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자치권을 빼앗기고 그들의 지위마저 박탈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종려나무는 이스라엘의 축제 때 사용하였습니다(레 23:40). 이스라엘 사람에게 종려나무는 통치권을 상징하였습니다. 주전 66-70년에 로마와의 두 차례 전쟁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려나무가 새겨진 동전을 발행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이한 것은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아로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라는 기대를 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왕이심을 선포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 사건이 수많은 군중 앞에서 자신이 왕이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유일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조용히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을 피하여 사역을 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억지로 임금을 삼으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피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되어 자신의 왕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의미하는 왕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건설하고자 하시는 나라는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으로 이루실 영적인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목적은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3:16). 

“호산나”는 시편 118:25에 나와 있는데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의 히브리어를 음역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 수전절, 유월절에 이 구절을 사용하여 찬송하였습니다. 이는 축제 때 성전의 성가대가 불렀던 “할렐” 찬송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인데 이를 영어로 하면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NIV)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이 있을지어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축제를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온 순례자들을 환영하기 위한 노래였습니다. 13절에서 무리들은 이어서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하였는데 영어 번역에서는 Blessed is the king of Israel(NIV)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대치한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 118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의 본래의 의미는 순례객을 환영하기 위한 노래였는데 현재 무리들은 이 노래를 메시아를 환영하는 의미로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공식적으로 무리들로부터 왕으로서 영접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로마의 승리의 입성식과 비교할 때 지극히 초라하였습니다. 로마의 장군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땅을 차지하고 돌아왔을 때 “로마의 승리”라는 호칭을 받았습니다. 승리자는 그가 얻은 전리품과 그가 사로잡은 적국의 지도자들을 끌고 오면서 그의 승리를 자랑하였습니다. 포로들 중 일부를 원형 경기장에 넣어 맹수와 싸우도록 함으로 한껏 흥을 돋은 후에 승리의 행렬은 끝이 났습니다. 이런 로마의 개선식과 달리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우리 주님은 왕이시지만 너무 초라하셨습니다. 

우리는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는 무리들의 영적인 형편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할 영적인 메시아로 오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동안 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공적으로 선포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 왜 이제 와서 왕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사람들의 환영을 용납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마 1:21). 사람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원했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죄의 세력에 억눌려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 여러 강대국의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고생한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예외 없이 죄의 포로가 되어 있고 죄의 다스림을 받는 식민 백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고 싶어도 죄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그 문제의 근본 원인은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도덕적인 죄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어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단절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인간은 인생의 목적을 몰라 방황하고 죄의 다스림을 받아 노예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죄가 주는 양심의 고통과 죄책감으로 무거운 짐진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누구나 다 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인간으로 어찌할 수 없는 위기의 상황에 처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구원할 구원의 주를 갈망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죄의 세력에서 건지실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고 갈구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로서 다가오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죄의 다스림을 받는 ‘식민 백성’이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으로 이루신 새로운 나라의 ‘자유 시민’으로 삼으시고 그의 사랑과 정의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직 이 통치를 받고 있지 않는 사람들의 구원의 절규를 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영혼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생이 없습니다. 영생이 없으므로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하면서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막 10:17). 예수님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갈망하며 호산나를 외치는 그들의 환영을 받아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내면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그후 예수님은 무리들의 요구대로 하지 않으시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무리들은 이런 예수님께 실망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사도들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임을 발견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의 ‘자유 시민’이 되었습니다.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요한은 공관복음서의 저자들과 달리 나귀를 얻는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스가랴 9:9의 인용하여 예수님이 어떤 왕이신지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스가랴 9:9에서는 “크게 기뻐할지어다”라고 되어 있지만 인용한 구절은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을 첨가하였습니다. 요한은 왜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을 넣었을까요? 보통 왕들은 군마를 타고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그의 힘을 과시하며 입성합니다. 이를 구경하는 군중들은 왕의 위엄 앞에 두려워 떨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왕들은 군대의 힘과 행정력과 통치자의 임의의 결정에 따라 통치합니다. 이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통치자가 자기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면 백성들은 억눌리고 두려워합니다. 통치자의 눈에 나지 않기 위해 숨죽이며 살아갑니다. 이런 절대군주나 독재자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은 불행합니다. 그들은 공포와 억눌림과 분노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갑니다. 권력은 백성들이 낸 세금과 노역과 군역으로 이루어집니다.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제국을 이룰 경우 권력자의 힘은 더 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통치는 세상 왕의 통치와 전혀 다릅니다. 세상 왕의 권력은 군대의 힘으로 유지되지만 예수님의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세를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생명을 주는데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셨는데 그 목적은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기 위함입니다(요 17:2). 예수님은 권위적으로 다스리지 않으시고 공의와 겸손으로 다스리십니다. 스가랴 9:9은 말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군마 대신 나귀의 새끼를 타십니다. 사람들은 군대의 위엄 앞에 넙죽 엎드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고 애를 씁니다. 나귀의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왕 예수님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의 새끼를 타셨기 때문에 다리는 땅에 끌리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옷을 벗어서 땅에 깔며 예수님께서 앉으실 나귀의 등 위에 얹어놓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환영하였습니다. 그들은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그들의 구원자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유지하시는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그런데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낮아져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심지어 그의 제자 그룹에 세리 마태를 넣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들을 잃은 나인 성 과부의 슬픔에 깊이 동정하시고 죽은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부담스러워하는 나병 환자에게 가까이 가셔서 그의 손을 대어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의 눈을 만지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상종하기를 꺼려하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다가가셔서 “물을 좀 달라”라고 부탁하실 정도로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동안 누워서 불평만 하는 병자를 일어나 걷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셔서 사람들로부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셨습니다(마 11:19).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초청하시면서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그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면서 마음의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그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마 11:28-30).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왕이 되십니다. 왕으로 다스리는 자로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지실 구원의 능력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뿔로 능히 원수의 세력을 물리치십니다. 예수님은 강한 자를 결박하실 수 있는 더 강한 자가 되십니다(마 12:29; 막 3:27). 누가 다스리느냐에 따라 사람의 행불행이 좌우됩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를 가진 사탄이 다스리면 두려움과 억눌림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겸손의 왕이시면서 구원의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되면 두려움과 억눌림으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릴 뿐만 아니라 그의 온유하고 섬세한 다스림 가운데 평화와 쉼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세상의 왕들은 대부분 그의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왕이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왕들에게 기대를 걸지만 곧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으로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시고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십자가와 부활로 해결해 주시고 영생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주십니다. 겸손의 왕, 구원의 왕을 영접함으로 하늘의 행복을 누리는 신앙 생활이 되어야겠습니다.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당시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예수님의 왕되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았지만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필요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구속의 계획을 잘 몰랐습니다. 그들의 이해는 이 땅의 것에 국한되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예수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게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습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십자가와 부활, 승천을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비밀을 깨닫게 하는 열쇠입니다.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나사로의 부활은 무리들의 흥분의 촉매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환호하였고 민심이 모두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때문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믿은 사람 중에는 헬라인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이 쓸 데 없다고 푸념하였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소용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라고 절망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말처럼 온 세상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초조함에서 나오는 과장된 발언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지금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고 따르고 환호하지만 이내 그들의 마음을 바뀌어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소리를 칩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들의 기대한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를 물리치고 유대인들의 독립된 국가를 건설할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도 무력하게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는 것을 보고는 무리들의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충동을 받아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다고 여기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군중심리에 좌우되어 예수님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절망의 순간에도 예수님을 제거함으로 그들의 권위를 지키고자 모의하였습니다. 

밀알의 진리를 가르치신 예수님(20-23)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한은 공관복음서에 없는 특별한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뵙고자 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유대인들의 관심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온 헬라인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유대인들을 헬라인들은 제외하고 헬라어를 말하는 모든 사람들을 헬라인이라고 합니다. 즉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헬라인들은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이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갈릴리 북부지역이나 데가볼리 지역과 같은 이스라엘 변방 지역에는 헬라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니면 더 먼 지역에서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을 것입니다. 이들이 유월절을 지키고자 온 것을 보면 이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곳곳에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은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였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눅 7:5). 가이사랴의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였습니다(행 10:2).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구약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찾는 자였습니다(행 8:27-28). 본문에 나오는 헬라인들도 모두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고 명절에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은 이처럼 경건한 이방인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방인들을 주목하여 기록했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헬라인들이 찾아온 것을 23절에서 예수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관시켜 예수님은 만민의 구주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 사역의 절정에 헬라인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요한은 오히려 현재 기대에 부풀어 예수님을 환영하였지만 며칠이 지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변덕스러운 유대인들과 대조시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직접 나가지 못하고 헬라식 이름을 가진 빌립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빌립은 갈릴리 호수 북쪽인 벳세다 출신으로 그 곳에는 헬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그 영향을 받아 헬라식 이름으로 지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헬라인들은 헬라식 이름을 가진 빌립이 친숙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직접 예수님께 들고 나가지 못하고 안드레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빌립은 오병이어 사건 때 예수님의 시험을 받아 낙제점을 받은 것이 전력이 있어 예수님께 나아가기가 두렵기도 하고 쑥쓰럽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점수를 잘 받은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께 나아가 말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를 말합니다. 그의 죽으심은 메시아로서의 사역의 절정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비참한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을 얻을 때”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24절 말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으심이 가져올 수많은 열매를 생각하시고 그의 죽음을 “영광을 얻을 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의 죽으심이 없이는 죄 문제 해결은 불가능합니다. 죄는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과 같은 왕국을 건설하여 독립국가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지만 유대인들이 꿈꾸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지만 이 땅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의 나라는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라 죄 사함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을 괴롭혀 온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인간은 죄의 노예로 스스로 죄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대속 제물이 되셔서 자신의 몸으로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셔서 죄의 최종 권세인 사망의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사망을 이기심으로 십자가의 죄 사함을 확증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인류를 괴롭혀 온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 역사의 핵심이요 절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만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로 인해 펼쳐지게 될 축복의 역사를 생각하셨습니다. 그의 희생으로 인해 맺게 될 열매를 생각할 때 예수님은 십자가를 영광으로 생각하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헬라인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그의 십자가로 인해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생각하시고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전환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십자가는 슬픔과 고난의 상징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차원에만 머물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날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 사함을 주셨다는 것을 믿지만 십자가를 넘어 영광의 십자가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능력과 열매를 생각해야 하는데 십자가의 고난과 슬픔에 매몰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시며 십자가의 고난을 넘어 부활의 영광과 이로 인해 맺게 될 생명의 열매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싫어합니다. 부모들은 자기가 겪은 가난과 고난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처럼 고난을 영광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영광이다라는 등식에 대한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때 고난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갖고 고난을 극복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의 영광을 밀알의 진리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을 한 알의 밀로 비유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 진리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당연한 원리입니다. 밀알은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밀알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그 인생에 아무런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밀알이 갖고 있는 생명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언젠가는 상실하게 됩니다. 밀알의 구조를 보면 배아(씨눈)와 배유(배젖)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씨가 싹을 트게 되는 곳이 배아이고 배아가 싹이 트도록 자기가 썩어서 영양분을 공급해줍니다. 이 과정을 가리켜 한 알의 밀이 썩는다고 말합니다. 적당히 썩으면 안되고 완전히 썩어야 하나의 싹을 틔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이 생명을 낳는 과정을 관찰을 하면서 분석할 수 있지만 생명이 싹을 틔우고 자라는 것은 신비에 속한 영역입니다. 한 알의 밀이 죽어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것을 보면 생명의 신비는 놀라울 따름입니다. 식물이 자라는 데에 땅, 공기, 물 등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 사람이 밀을 섭취하면서 그것이 몸에 들어가 살과 피, 신경과 힘줄과 뼈가 되는 것도 배우 신비스럽습니다. 우리는 그냥 그렇게 되는 것으로 믿을 따름이지 우리 스스로가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우리는 그 생명을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과 뜻에 맞는 생명의 사용을 곧 ‘죽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반대로 자기의 유익과 안락함을 위한 생명의 사용은 ‘죽지 않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입니다. 반면 우리의 죽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얻은 생명을 예수님을 위해 드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참여’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나의 생명을 드려 다른 사람을 위해 대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속은 예수님이 이미 100%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아니면 다른 사람의 죄를 속하기 위해 나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 주님이 주신 대속과 영생의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과의 연합을 추구하며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한 알의 밀이 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자기의 죄의 만족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연합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한 알의 밀과 같습니다. 밀알는 뭔가를 위해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바로 밀일아 땅에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반변 하나님 주신 생명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한 알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지 않으려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고 발버둥쳐 보았자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 생명은 아무런 열매도 없이 ‘반납’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 번 뿐인 생명을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필요합니다.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예수님은 밀알의 진리를 그의 십자가에 적용하고 나서 이제 제자들에게 적용하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5절은 공관복음에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막 8:35; 마 16:25; 눅9:24). “자기의 생명을 사랑한다”는 말은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산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생명”은 유한한 육신의 생명을 말합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의 것에 집착하다가 결국 자기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세상에 재물을 쌓아두고자 합니다. 그들은 자기 생명이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의 간섭도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첫째이고 자기 가족이 둘째이며 이웃은 그 다음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건강하고 자기의 것을 잘 챙겨야 다른 사람의 것도 잘 챙기고 도와주는 삶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여유가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자선을 베푼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도 여유가 있을 때 섬기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여유가 생길 때는 이미 육신이 늙어 거동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의 건강을 신경 쓴다고 해도 영생하는 자가 없습니다. 모두 늙게 되고 병들어서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살지 않는 것은 결국 자기 생명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라는 말은 ‘장차 올 세상’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잠시 세상의 낙을 누리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죄악되고 타락한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육체의 생명에 집착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사는 자들은 장차 올 세상에서 영생하도록 보전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 때도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로 당신의 백성들을 눈동자와 같이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다하는 순간까지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지 않으시고 보존하십니다. “자기의 생명을 미워한다”는 말은 자기의 타락한 본성을 부인하고 세상이 주는 안락함과 즐거움에 매몰되는 삶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들은 ‘장차 올 영생’을 소망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며 자기의 물질과 젊음과 재능을 하나님의 생명 구원 역사에 드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잠깐’의 삶에 연연하지 않고 영원을 사모하며 거룩한 순례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우선권을 두고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며 자기를 희생하기를 즐거워합니다. 그들은 자기 희생을 통해서 예수님의 한 알의 썩는 밀알의 삶을 본받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 세상에서 영생의 활력과 기쁨을 누리며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가 주시는 상급을 받고 주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축복을 살게 됩니다.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나를 따르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의 가르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한 알의 썩는 밀알로 사는 자들입니다. 제자들은 현세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같이 있게 됩니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고 심문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기 전 날 제자들에게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씀하시면서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3). 또한 예수님께서 수난받으시기 전날 밤 드렸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요 17:24). 그러므로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라”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영광을 의미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드리셨습니다. 이와 똑같은 원리가 제자들의 삶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자기와 똑같은 밀알이 복제되듯 진정한 제자의 삶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복제하는 삶입니다. 제자들은 자기 생명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결과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의 희생의 결과도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을 때 부활의 영광을 얻은 것과 같이 제자들이 세상에서의 삶에 집착하지 않고 기꺼이 제자로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자신의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 생명은 부활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이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자신을 희생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가 희생적인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제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고(27-36)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예수님은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시면서 현재의 심정을 토로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23절에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말과 대조가 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맺게 될 열매와 부활로 인해 받으실 영광을 생각하고 십자가를 “영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의 고통을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그 한 몸으로 다 뒤집어 쓰시고 저주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고통보다 심적인 고통, 영혼의 고통이 더 컸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죽으시고자 하실 때 사람들의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아버지로부터도 일시적으로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하 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마 27:46; 막 15:34). 예수님은 앞으로 진행될 그의 수난을 생각할 때 그 짐이 너무 무거워 견딜 수 없어 솔직한 심정을 아버지께 토로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는 시편기자가 고난 중에 하나님께 토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기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하고도 완전한 중보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딤전 2:5).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과 함께 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요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한 번에 영원한 속죄를 드리시게에 합당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십니다(히 9:12). 

예수님은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의 고난을 회피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의지하고 사랑하는 아버지께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다시 ‘위대한 전환’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상기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일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마지막 때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고비는 그가 했던 사명 중 가장 힘든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힘들다고 절정의 때에 멈추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대속의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도 나의 때를 고집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때를 따라 움직이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신앙 생활을 합니다. 자기의 때는 엄청나게 민감하지만 하나님의 때에는 너무 둔감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 움직이고자 할 때 자기의 뜻을 굽히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죽기까지 복종하셨듯이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요한은 공관복음서와 달리 겟세마네 동산의 자기 부인의 기도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대신 예수님의 밀알의 진리를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자기 부인의 기도를 그 뒤에 배치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겟세마네의 기도의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요한은 다만 고뇌의 기도의 처절함에서 재빨리 영광의 기도로 옮겨갔습니다. 요한은 헬라인이 찾아온 사건과 연결시키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은유하는 밀알의 진리를 말하면서 이를 곧바로 “열매”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면서 잠시나마 짤막하게 그의 고뇌를 비추셨지만 바로 28절에서 다시 “영광”으로 옮겨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절한 고뇌의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이 영원하고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창 1:31).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때 순수해지고 겸손해집니다. 반면 자기 영광을 구할 때 교만해지고 죄에 빠지며 치졸해집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만물이 다 그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듯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때 존재의미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영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지만 성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심으로 성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있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나님은 이미 자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셨고 또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이미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그가 행하신 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셨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요한은 이를 보고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1:14). 예수님의 성육신을 깨달은 사람들은 그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체험했습니다. 그를 체험한 자들은 은혜 위에 은혜를 충만히 받았습니다(1:16).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통해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2:11). 특히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함으로 그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12:11).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구속 역사를 완성하심으로 그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죄 사람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 2:9-11).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 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계5:2).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송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를 심판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은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이제 곧 다가오는 유월절을 통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나 아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시어 자기를 희생하신 것입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는 순간이 다가올 것입니다.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직접 음성으로 직접 말씀하신 사건이 세 군데 나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두 가지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나오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말씀하셨고(마 3:17; 막 1:11; 눅 3:21-22), 변화산 사건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7:5; 막 9:7; 눅 9:3). 요한은 한 가지 사건만을 기록했는데 한 알의 밀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고뇌에 찬 기도를 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으로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을 위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 알지 못하고 다만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고 천사가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천둥이 울렸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늘에서 온 음성을 흔하지 않은 자연현상으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계시하신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말씀하신 목적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실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여러 번 예고한 것으로 인해 불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12장에서도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심각한 분위기를 인지할 뿐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초자연적으로 예수님께 말씀하신 것을 통해 제자들이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충격적인 일을 당했을 때 그들이 믿음을 잃지 않도록 도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주변에 있던 유대인들 또한 이런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리는 것을 계기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영접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 사실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말씀하실 때 예수님을 찾아온 헬라인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메시아가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헬라인들은 이런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님에 관하여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직접 예수님을 만나면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면서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를 계기로 이방인의 첫 열매의 부류의 속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서 오는 음성을 통해 그들이 믿음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가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심으로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위한 것인데 심판이 이르렀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십자가는 구원과 심판을 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것은 다른 말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기준입니다. 독생자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3:16).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3:17).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3:18). 앞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결코 빛 가운데에로 나아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봐 두려워 빛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혀 어둠의 다스림을 받는 삶을 삽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에게 임한 심판입니다. 뿐만 아니라 심판은 세상 임금에 대한 심판을 말합니다. 세상 임금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사탄을 가리킵니다(엡 2:2).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습니다(16:11).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습니다(마 27:45; 막 15:33; 눅 23:44). 예수님의 죽음은 사탄이 예수님을 이긴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의 운명의 예고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갈라져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졌습니다(마 27:51; 막 15:38; 눅 23:45; 엡 2:14).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의 머리를 치셨습니다(창 3:15). 그러나 사탄은 완전히 파멸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완전한 파멸은 미래의 일이지만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들의 심판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들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 밤낮 괴로움을 받을 것입니다(계 20:10).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린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자 그를 메시아로 생각하고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면 그의 영향력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했습니다(11:52).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 형을 받고 땅에서 들리게 되었습니다. 나무에 매달리는 것은 저주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친히 저주받으심으로 사람들을 저주 가운데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땅에서 들려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심으로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셨습니다. 대적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높이 세워 만민의 조롱거리로 삼으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목격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인정했습니다(마 27:54). 거듭남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던 바리새인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19:39). 십자가의 강도 한 사람은 죽어가면서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라고 하면서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부탁하였습니다(눅 23:41-42).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와 패배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영광과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뿐만 아니라 “들린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구원역사는 부활과 승천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행 5:30-31). 

“이끈다”는 것은 메시아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메시아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세상 왕이 쫓겨가고 사람들은 그의 압제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왕국의 중심이 되실 것이고 그의 백성이 된 자들은 그 누구도 쫓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끈다”는 것은 쭉정이는 바람에 날려 분리하고 알곡을 거우어 들인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끄는 일’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이끄시고 도우실 것입니다(16:7). 그 어떤 세력도 우리 주님의 이끄심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들을 보내셔서 자기의 택한 자들을 이끄십니다. 그의 이끌리심은 불가항력적이어서 어떤 완악한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옥에 가두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를 말에서 떨어뜨려 고꾸라뜨리시고 그를 자기에게로 이끄셨습니다. 그는 주님의 강권하는 사랑으로 박해자에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이끄심은 이처럼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주님이 이끄실 때 우리는 마지막 날까지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모든 믿는 자”을 의미합니다(롬 1:16; 3:21; 10:4).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을 차별 없이 자기에게로 이끄십니다. 그 대상에는 예수님을 찾아온 헬라인도 포함됩니다. 성경은 믿는 자와 불신자, 구원받는 자와 길 잃은 자의 분명한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나타냅니다. 십자가는 구원과 심판을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십자가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을 주시고 이를 거절하는 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자들입니다.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심판이 이르렀음과 “내가 땅에 들리면”이 의미하는 바가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킨다고 코멘트하고 있습니다. 무리들은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시편 89:36, “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는 호칭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이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라는 질문에서 “인자”라는 말을 사용한 곳은 이 곳이 유일합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인자”는 다니엘 17: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라는 구절을 의미한 것으로 메시아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인자가 땅에서 들려야 하리라”, 즉 인자는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인자”는 그들이 생각한 인자가 아닌 전혀 다른 “인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인자는 누구냐?”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 어디에서 메시아가 죽지 않는다는 말을 없습니다. 구약성경은 곳곳에 메시아의 수난과 죽으심을 예언하였습니다. 특히, 이사야 53:1-12과 시편 22:1-18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무리들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의 통치와 그의 나라의 영원함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이와 같은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사 9:7; 단 7:14; 겔 37:25). 성경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신성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탁월함, 전지전능하심과 영원성에 관한 것이고 인성에 관해 말할 때는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와 섬김, 그의 고난과 죽으심에 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둘 사이의 적절한 조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고난과 죽으심은 배제하고 그의 영원성에만 집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과 그의 나라의 영원성은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재림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복음서를 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예수님은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신학적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신 그들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몇일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에게 절박하게 호소하셨습니다.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와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는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사람과 함께 하신 시간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몇일 후면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문받으시고 이방인 총독에게 넘겨져 재판을 받고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그들은 성육신의 영광을 보고 누리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만의 생각에서 벗어나서 빛이 사라지기 전에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만일 그 기회를 저버릴 때 그들은 어둠에 붙잡혀 벗어날 수 없고 빛으로 나아올 기회마저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빛이 있을 동안 빛을 믿는 자는 빛의 아들이 됩니다. 그런데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을 미워하고 어둠을 사랑합니다. 이는 그들의 악한 행위가 빛 가운데 드러나기 때문입니다(3:19-20). 빛의 아들이 되려면 어둠의 일을 벗어야 합니다(롬 13:12).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3:21). 빛으로 나아온 사람들은 그 내면이 어둠에 붙잡히지 않고 빛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1:4). 그 생명은 한계적인 육힌의 생명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빛을 영접한 자들은 생명력이 충만한 삶, 의미 있는 삶, 목적이 있는 삶, 방향성이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빛의 자녀들의 삶은 진리에 기초해서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크리스천은 도덕적으로 탁월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13-14). 빛의 자녀는 세상을 비추는 역할을 해서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5:16).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신 말씀이 유대인들을 자극하였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아직 십자가의 때가 완전히 차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마 21:17). 베다니는 감람산에 있는 한적한 곳으로 예수님께서 낮에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난 후 저녁에 쉬셨던 장소였습니다(눅 21:37).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준비시켜 마지막 만찬을 갖고자 하셨습니다(마26:18, 19; 막14:13-16; 눅22:10-13). 그 곳은 마가의 다락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불신과 예수님의 마지막 호소(37-50)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 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37-51절은 저자 요한의 설명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유대인들의 불신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믿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대다수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직접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통 기적을 보면 믿음을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의 실제 삶에 기적을 베풀어 주시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조건으로 내겁니다. 그런데 기적은 사람의 마음 가운데 믿음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기적은 성경의 말씀이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인 것으로 믿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구주로 영접하게 도와줄 뿐입니다. 기적 자체에 매이는 사람들은 결코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된 유대인의 왕으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심문을 받으실 때 아무런 일을 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등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충동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대다수 유대인들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는데 요한은 이사야 53:1을 인용하여 그들의 불신이 구약성경의 예언을 그대로 성취함을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선지자들은 장차 올 메시아에 대해 수없이 예언하였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 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증거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예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에 대해 증언하셨고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며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한 것”, 즉 메시아가 오심을 믿지 않았으며 “여호와의 팔”, 즉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사야가 전한 메시아의 모습은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모습이셨습니다(사 53:2).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셨고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사람들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사 53:3). 사람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연약한 메시아, 볼품 없는 메시아, 고난받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의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이유에 대해 다시 이사야 6:10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했습니다. 이사야는 마음, 귀, 눈을 차례로 언급하였는데 요한은 눈과 마음만을 언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그가 섬기는 백성들이 마음을 완고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사역자가 사역을 하면서 거절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복음을 영접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딤전 2:4).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도록 하기기 위해 인자를 베푸시며 용납하시고 길이 참으십니다(롬 2:24). 그런데 끝까지 거절하는 자는 어둠이 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세상은 인간의 죄로 인해 본래 어둠에 속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그들이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그들이 듣지 못하게 하며 그들의 눈이 보지 못하게 하였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는 것은 복음의 사역자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사람들의 죄로 인해 그들의 완고함은 정해져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 완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므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롬 1:28). 우리는 전도하면서 살마들의 완악함과 그들의 거절에 마음이 상해 힘들어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로 인해 전도의 두려움을 갖고 위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요한 같이 그들의 거절의 이유를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요한도 이사야 6:10에서 그 이유를 찾아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왜 저렇게 완악할까 이해가 가지 않은 것으로 답답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거절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완고함을 더 완고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거절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의 거절로 인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 역사의 희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완고함으로 인해 십자가에 넘겨지게 되셨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버린 돌을 보배로운 모퉁잇돌로 삼으셔서 교회의 기초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버림으로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예언하셨던 구속역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심자가로 구원이 이루어졌고 구원의 소식이 이방인에게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고 이는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밝혔습니다(롬 11:11). 예수님은 거절했던 무리 중에서 일부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설교를 들었고 그들은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며 간절히 구원의 길을 갈망했습니다(행 2:37). 베드로는 이런 그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방향을 제시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행 2:40-41). 그러므로 사람들의 거절이 성경에 예언된 것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거절을 통해 더 큰 구원 역사의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은 41절에서 이사야 6:1-4의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사야가 성전에서 주의 영광을 본 것을 메시아와 연관시켰습니다. 요한은 이사야가 성전에서 “주의 영광”, 즉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거기서 선지자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는데 요한은 그것을 예수님으로 연결시켰습니다. 그가 거기서 본 영광은 예수님께서 이제 드러내실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4-50절은 믿음을 갖도록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마지막으로 호소하는 말씀입니다. 44절에서 “외쳐 이르시되”라고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의 간절한 호소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권고는 그 동안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것을 요약하는 것이고 재반복하여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주제는 믿어야 한다는 것,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것, 빛과 어둠 가운데 있는 세상의 반응,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심판이 아닌 구원이라는 것, 예수님을 저버리고 그 말씀을 받지 않는 자에게 임할 심판, 하나님의 명은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사는 요한만이 전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그의 수난 주간에 성전 구역에서 무리들에게 전하신 말씀으로 보여집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것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셨고 그를 보는 자는 그를 보내신 이, 즉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셨습니다. 44-45절의 표현은 성자이신 예수님과 성부이신 하나님의 신비하고도 친밀한 연합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그 본질에서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습니다(1:18).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느냐?”는 질문은 빌립이 한 질문이기도 합니다(14:8). 예수님의 제자도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실증적 규명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요한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제시하였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예수님은 자신이 빛으로 세상에 왔고 그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둠은 강한 세력이 있습니다. 어둠에 사로잡힌 자는 스스로 빛 가운데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빛되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빛’이라는 단어가 24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 빛은 또한 영생과 연결됩니다(1:4). 그런데 빛되신 예수님을 저버린 자에게는 그를 심판하실 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하고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빛으로 나아오기를 싫어합니다(3:19). 그러므로 빛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어둠 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3:18).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자기 나름대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말씀을 그대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말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신 것을 한치의 틀림도 없이 그대로 전하셨습니다.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한 자는 그가 하신 말씀을 듣고 지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듣기만 했지 영접하고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50절에서 “그의 명령이 영생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곧 영생이라는 등식의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으로 인도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우리가 영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말씀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진정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말씀을 단순하게 순종하는 자입니다. 



댓글 남기기

About Me

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카테고리

Bible spring에서 더 알아보기

지금 구독하여 계속 읽고 전체 아카이브에 액세스하세요.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