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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1-38)

예수님은 율법과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일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사람들의 병을 고치심으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심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의 민족적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심으로 율법의 돌로 치라는 계명을 뛰어넘어 그녀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당시 종들이나 하는 발 씻는 일을 하심으로 제자들도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문화적 금기를 깨시고 사랑과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행동은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는 교훈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할 때 제자들의 탁월함은 빛을 발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세상을 떠나십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유언적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매우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일을 시작으로 ‘다락방 강화’를 시작하십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1-5)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유월절 전은 NIV에서는 It was just before the Passover Festival로 유월절 바로 전,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기 전날 밤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성만찬 제정에 대한 기록을 생략했습니다. 요한은 대신 13-17장에 걸쳐 길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고별 메시지를 전하신 것을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긴 메시지를 “다락방 강화”라고 합니다. 그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이 만찬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만찬을 베푸시면서 성만찬의 의미를 말씀하신 것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만찬에서 제자들과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떡은 십자가에서 찢기신 몸을,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의미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으로 세례와 더불어 기독교의 유일한 의식이 되었습니다. 저자 요한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성만찬의 기록을 생략하고 다른 내용을 기록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요한은 이미 6:52-58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언급하였기에 여기서는 성만찬의 의미를 생략하고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 가장 늦게 기록된 것으로 요한은 이미 다른 복음서의 독자들을 고려했을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자기가 경험하고 느낀 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기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그의 말씀에 대해 입체적으로 고찰할 수 있습니다. 저자의 다양한 기술 방식과 주제를 파악하면서 우리는 그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4 복음서를 통해 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내용이 참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13:1부터 고별 메시지로 다락방 강화를 시작합니다. 열두 제자들은 유월절 전날 밤에도 서로 “누가 크냐?”라고 하면서 논쟁을 했습니다(눅 22:24). 예수님은 이 가운데에서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27). 요한은 예수님께서 “섬기는 자”로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지 않고 친히 섬김의 행동을 실천하신 것을 강조해서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13장의 사건이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 경쟁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전제로 생각할 때 “발을 씻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때를 말합니다. 그 후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셔서 아버지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를 말합니다. 우리는 죽는 것을 가리켜 ‘세상을 떠난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영어로는 ‘세상’을 this world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세상’은 죄악 된 세상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곳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가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은 죄로 인해 망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망가진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무너진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나고 회복되는지 자세하게 그 과정을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회복의 역사의 마침표를 찍고자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오신 세상을 떠나셔야 하셨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야만 성령께서 오십니다. 그가 이 세상에 계신 것은 잠시이지만 성령께서는 영원히 그를 믿는 제자들과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 회복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 사함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죄가 세상을 망가뜨렸지만 죄 사함은 세상을 회복하게 합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은 그가 부활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을 말합니다. 부활은 사탄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실 것이고 부활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의 첫 출발이 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영원히 중보하십니다(히 7:25). 예수님의 떠나심은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닙니다(14:18). 그것은 잠시이고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내셨고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의 오심으로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제자들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의 떠남은 제자들에게 오히려 유익입니다(16:7).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가 받을 영광을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면은 이 두 감정이 서로 교차하면서 복잡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진행될 모든 것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으로 그에게 닥칠 일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은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정해진 시간, 즉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죽으심으로 이 세상을 떠나십니다. 때가 이르렀다는 것은 ‘때가 찼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닥칠 일을 다 아셨기 때문에 마음이 몹시 힘드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27). 그가 차라리 닥칠 일을 정확히 모르면 심적 고통이 덜 할 텐데 정확히 아셨기 때문에 마음에 괴로우셨습니다. 그의 심적 부담은 상상을 초월한 고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모든 죄를 그 어깨에 모두 짊어져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대속의 죽음이라 지옥의 고통을 맛보는 죽음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가장 힘든 시간에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 사람들은 직접적으로는 열두 제자를 가리킵니다. 제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허물과 실수가 많은 자며 인간적으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자들입니다. 베드로는 거친 행동과 조심하지 않는 언행으로 예수님의 책망을 많이 받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경쟁심이 많았고 편협하고 인간적이었습니다. 빌립은 계산적인 사람이었으며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열혈당원 유다는 혈기가 많고 유다이즘이 강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잡히시고 심문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수제자 베드로가 자기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는 말은 NIV에서 having loved his own who were in the world로 ‘세상에 있었던 자기 사람들을 사랑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죄악 된 세상에 노출되어 있었고 허물과 실수가 많은 자이었고 문제에 잘 휘말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되셔서 이런 그들을 보호하셨고 말씀으로 그들을 깨우치셨으며 그들을 조금도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시고 인내하심으로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더디 자란다고 채근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믿음이 자라기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리새인들의 정죄로부터 보호하시고 변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제자들을 일깨우기 위해 책망의 사랑으로 도우셨습니다. 이 사랑은 진리로 이끄는 사랑이었습니다. 무조건 봐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은혜와 진리가 조회될 때 완벽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1:17). 예수님은 자신의 형편에 따라 사랑의 크기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늘 한결같이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히 13:8).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인 “자기 사람들”은 열두 제자만을 가리키지 않고 세상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죄악 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빛으로 어둠에 사로잡힌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백성들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1:10-11). 그런데도 하나님은 죄악 된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3:16).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구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인 사랑으로 선인이나 악인이나 차별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해를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마 5:43-45).

예수님은 사랑할 자격이 없는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은 마지막 숨지는 순간까지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눅 23:34). 예수님은 마지막 숨지는 순간까지 자기 어머니를 걱정하셨고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19:26-27). 또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은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정한 시기가 다가오셨을 때 마음이 괴로우셨지만,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마귀는 벌써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저녁 먹는 중”이 3절에 포함되어 있지만, 원문이나 영어 성경에는 2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저녁 먹는 중에 마귀가 이미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는 시제는 had already put it into the heart of …(ESV)로 과거완료를 써서 “저녁을 먹는 중”보다 먼저 일어난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팔기로 마음에 이미 작정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유다가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악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무리를 먹이신 사건 후에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떡을 주기를 거부하자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6:66). 유다는 이때부터 예수님이 그가 기대하던 메시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6:71을 보면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기대가 무너지면서 그의 마음에 서서히 예수님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고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그가 베푸시는 긍휼의 역사에 대해 못마땅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제자 그룹의 돈 맡은 자로 있었기 때문에 돈궤에서 헌금을 횡령하는 이득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시겠다는 여러 번 하시자 이제는 예수님의 효용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 22:4에서는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줄 방도를 의논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고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모의 가담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마귀의 조종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처럼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인 유익을 좇으면서 예수님의 길을 따르기보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만일 그가 처음부터 마귀의 조종을 받았다면 그가 행한 일의 책임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룟 유다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고 구속역사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므로 그에게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가 돈을 돌려주고 자살을 함으로써 자기 잘못을 뉘우쳤고 죄의 대가를 치렀다고 하여 그의 배반을 가볍게 다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죄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배반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입니다. 또한 그의 후회는 주님의 용서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죄는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나아간 자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것이 아니므로 그는 영원한 파멸의 길로 간 것입니다. 유다는 그의 마음에 죄가 싹트기 시작할 때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인간에 가장 큰 적입니다. 마귀는 초자연적인 권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세상을 통치할 수 없습니다. 마귀의 권능은 악의 지배에 동의한 사람에게 효력이 있습니다. 유다는 그의 내면의 탐욕의 죄에 동의했습니다. 그는 자기 의지의 작용으로 사탄의 도구가 되기로 동의한 것입니다.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저녁 먹는 중”이라는 구절은 영어 성경에서는 2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3절의 주어는 예수님이 되고 동사는 4절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절의 내용은 분사구문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ESV에 기초해서 다시 번역하면 “저녁 식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마귀가 이미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는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악 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죄로 병든 인생들을 섬기셨습니다(빌 2:6-8). 이제 그에게는 구속역사의 절정인 십자가만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사 다 그의 손에 주셨습니다. 인류 구원 역사의 대망이 그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구원의 그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무릅니다(요 3:35-36). 그러나 예수님은 양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십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십니다(10:18).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실 것입니다(히 8:1). 하나님은 십자가의 대속의 과업을 이루신 아들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고자 하십니다(빌 2:9-11).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이 행동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마지막 섬김의 모습이고 섬김의 절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제자들도 마땅히 그가 보이신 본을 따라 마땅히 섬겨야 함을 가르치고자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셨습니다. 이 모습은 영락없이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발을 씻는 것은 헬라. 문화권에서 아주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는 유대 문화권에서는 정결 예식으로 종교적 행위였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전에 따뜻한 물에 손과 발을 씻었습니다. 또한 손님이 올 때 환영의 의미로 하인이 손님의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디모데후서 5:10에 보면 성도들의 발을 씻는 것은 겸손한 섬김을 상징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발을 씻는 행위는 하인들이 하는 비천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아내가 남편에게, 학생이 스승에게 발을 씻겨주는 것은 최고의 존경 표시였습니다.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면서 서로 경쟁하고 있었습니다(눅 22:24-27). 그들은 제자로서 스승인 예수님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 마땅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스승의 발을 씻기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발을 씻기는 일은 제자 그룹 중에서 가장 서열이 낮거나 나이가 어린 제자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죽어도 자기가 끝이 되어 섬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사는 사회도 서열에 매우 민감합니다. 사람들은 누가 더 크냐 하는 것을 따집니다. 오늘날은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한 사람의 영향력을 결정합니다. 사람들은 위로 올라가려고 경쟁하지만 섬기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고자 경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곧 자신의 권위와 영향력을 상실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해 주면 그들은 자기를 무시하고 기어오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자기의 힘을 과시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라고 하셨습니다(마 25:26-27; 막 10:43-44).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셨습니다(막 10:45). 이제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을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한 사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열두 제자들에게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이 모습은 빌립보서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모습은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가장 낮은 분으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발을 씻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더 큰 희생을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그것은 곧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빌 2:7).

자신의 발씻기는 것을 거절한 베드로(6-11)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시몬 베드로는 자기 차례가 되자 정색을 하고서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그는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은 사회적 통념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왜 말리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그는 수제자로서의 차별성을 부각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라는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자기가 종이 되어 예수님께 충성하겠다는 맹세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허물과 실수가 잦았지만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셨을 때 예수님을 말렸습니다(막 8:32). 그는 예수님께서 어디론가 가시겠다고 하자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맹세할 정도로 충성스러웠습니다(37). 그는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도록 내버려 두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기가 하는 것을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이후에는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아직 관습적 통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은 충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 주는 것의 영적인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발을 씻는 것은 신자가 회개하고 정결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스스로 발을 씻을 수 없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 주시도록 나의 더러운 발을 내놓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 주시는 것은 십자가의 죄 용서함과 연결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죄 씻음으로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죄 용서함은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셔서 나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씻으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해서 더러운 발을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런 영적인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이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약속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더 강한 말로 예수님의 행동을 저지하였습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자기 체면을 강조하였습니다. 자기가 제자가 되어 스승의 섬김을 받았다고 하면 자기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승에 대한 도리도 모르는 사람으로 낙인 찍힐 것이라는 두려움도 작동했을 것입니다. 그는 다소 거칠고 직선적이었고 그러면서도 순수하고 겸손하였습니다. 다만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발 씻김을 강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스승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상관이 없다”는 말에서 “상관”은 원어로 ‘분깃’을 뜻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구하는데 여기서 “분깃”과 같은 단어입니다. 70인역에서 ‘분깃(상관)’이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게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분깃을 나눈 자는 예수님과 연합한 자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자는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를 영접하여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영광 중에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14:3; 17:24). 만일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지 않으시면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주실 분깃인 영생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 발 씻음을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영생의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 선물을 받지 않겠다는 것은 영생의 선물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발 씻음을 거절하는 것은 생사에 관련한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는 구주와 죄인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아니면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도덕적 교훈을 배우고 인생의 철학을 배우는 스승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을 뛰어 넘어 인생의 근본 문제인 죄 문제를 해결함 받고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는 구주와 죄인과의 관계입니다.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예수님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구원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의 자아를 발견이 무척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눅 5:8). 베드로는 이미 영생의 말씀을 체험한 자로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고백하였습니다(6:68). 다른 사람들은 다 떠나갔지만 영생의 말씀을 체험한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꼭 붙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하며 이미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영접했습니다(막 8:29).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은 베드로의 자기 의를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다만 예수님의 발 씻음의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사회적 통념에 기초해서 생각했기 때문에 거절한 것입니다. 그의 거절은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열정인 사랑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영적 무지와 자기 의로 거절의 형태로 드러났을 뿐이었습니다.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는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끊어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본능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에서 예수님이 없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라고 과도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는 아예 목욕 시켜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목욕한 자로 다 깨끗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발 씻음을 통해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실 뿐만 아니라 성결한 삶의 영적인 의미를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표적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표적은 기적을 베푸신 사건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변화의 능력자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거듭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떡을 요구하는 무리에게 자신이 생명의 떡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고난받으실 예수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생명을 얻고 그 생명으로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는 영적인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13장의 사건이 표적은 아니지만, 발 씻음과 목욕을 통해 거듭남과 성결한 삶의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목욕은 예수님을 영접한 자로 법적으로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고 하심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롬 3:24). 원래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롬 3:23).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롬 3:25). 이렇게 의롭다고 하심을 얻은 자로 선포된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이루어지는 일회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다 깨끗한 자”라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피로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을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사 1:18).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을 자이지만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으로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고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게 하셨습니다(딛 2:14).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은 구원을 받지 못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구원받은 성도라도 날마다 발을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은 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은 것은 법적인 구원의 선포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완벽한 자가 아닙니다. 그는 법적으로, 신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죄악 된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죄에 넘어집니다. 이는 마치 애굽의 노예 생활을 수백 년 동안 해왔던 노예 백성 이스라엘이 출애굽 했다고 하루아침에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세상 가운데 거룩하게 살고자 하지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때가 묻습니다. 그러므로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발을 씻듯이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나의 더러운 발을 내밀고 예수님께서 씻어 주도록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죄를 씻을 수 없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죄악 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는 일생에 한 번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늘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더러운 발을 내밀기가 부담스럽고 수치스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나의 더러운 것을 감추고 싶습니다. 만일 내밀지 않으면 더 더러워져 나중에 내밀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겠다고 하실 때 우리는 나의 더러운 발을 내밀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요일 1:8-9).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를 배반한 유다의 발도 씻기셨습니다. 유다는 영적인 목욕을 한 자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으므로 거듭난 자가 아닙니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예수님의 제자 그룹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유다를 통해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다른 목적을 가지고 교회 구성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언젠가 예수님이나 교회가 자기가 추구하는 목적에 맞지 않으면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잘 믿다가 떠나간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양은 그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손에서 예수님께서 택하신 자를 빼앗을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므로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10:27-29). 예수님은 목욕과 발 씻음의 두 가지 씻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거듭남과 죄 용서함이라는 두 가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런데 유다를 씻기신 것은 그를 씻기심으로 예수님의 섬김의 모습을 강조한 것이지 두 가지 영적인 의미, 즉 거듭남과 영적인 성결을 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욕과 발 씻음의 영적인 의미를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배반할 자가 누구인 줄 다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배반자의 발도 씻기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선인이나 악인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공평하게 사랑하시는 보편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팔 자를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라는 결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라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자만이 ‘목욕’의 은혜와 ‘발 씻음’의 은혜를 받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유사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음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인해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다(롬 9:1). 그러다가 그는 이스라엘에게 난 자가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롬 9:6-7). 바울은 하나님의 역사는 ‘남은 자’의 역사임을 역설하였습니다(롬 11:5).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공동체 내에서 예수님을 배반한 자가 있다고 해서 충격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래 동안 신앙 생활을 잘 하다가 하루 아침에 예수님과 교회를 등지고 있는 사람을 볼 때 마음이 안타깝고 믿음 생활 잘 하고 있는 성도들도 회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제자들은 자기도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나 하고 늘 두려워 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유다와 같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피로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영접한 자,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신 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고전 1:8).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확신해야 합니다(빌 1:6). 

본을 보이신 예수님(12-17)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예수님은 종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를 마치신 후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제자들의 주와 선생으로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당연히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발 씻음의 도덕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 모두 지금 당장 깨닫지 못했습니다. 도덕적인 의미는 주와 선생이 되어 낮아져 섬기신 것을 말하고 영적인 의미는 ‘목욕’과 ‘발 씻음’의 상징적인 의미로 거듭남과 죄 용서함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사는 문화권에서 주와 선생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은 문화적인 충격이었습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베드로는 이를 수용하지 못하여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행동을 말렸습니다(8). 예수님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아직은 깨닫기에는 시기상조라는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라고 물으심으로 예수님의 섬김을 마음에 간직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 또는 “주”라고 불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선생”은 12회, “랍비”는 9회, “주”는 25회가 나옵니다. “선생”은 히브리어의 ‘랍비’를 말하는 것이고 “주”는 유대인들이 흔히 손님이나 존경하는 자들에게 붙였던 칭호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러하다”라고 하신 것은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의미하신 “주”라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이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진정한 의미의 “주”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20:28; 행 2:36).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가르치신 것은 후에 그 가르침을 떠올려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성경을 가르치면서 신앙 초보자들이 깨닫지 못하더라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성도들은 성경의 신학적 내용에 대해 굳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을 성경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일지라도 반복해서 듣다보면 언젠가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또한 성경의 지식의 조각이 모여 그것이 어떤 형태를 갖추게 될 날이 이르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때 성령의 조명으로 언젠가는 성도들이 깨닫고 영적인 진리의 지식이 자라고 견고해지게 될 것입니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요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 종의 모습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어 섬기신 사건은 제자들에게 결코 잊지 못할 감동적인 사건을 남았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더이상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섬김을 받을 기회가 없습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신 이야기는 예수님의 섬김의 사랑이 나타난 또 다른 사건이입니다(요 21장). 그러나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지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겼으니 제자들 또한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크냐?”라고 하면서 서로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스스로 낮아져서 주와 또는 선생이신 예수님의 발을 씻겨주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섬김받으려고 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권세를 부리고자 할 때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섬김의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백성들이 서로 낮은 곳을 향해 가는 나라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알고 기꺼이 자기를 희생해서 도움을 주고 기도해 주고 함께 해주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섬김의 원리가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를 통해 실현되기를 원하십니다. 

발을 씻기는 것은 당시 교회에 널리 퍼진 관습으로 손님을 접대할 때 행했습니다(딤전 5;10). 당시 사람들은 샌달을 신었고 흙먼지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손과 발을 씻는 것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율법에 기록된 것으로 정결 예식으로 지켰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보편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발을 씻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는 것은 종이 하는 일로 실제로 자신이 그 사람 밑으로 들어간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스스로 낮아지셔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겼으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낮아져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본을 따라 그 자취를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어릴 때에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한 자들은 남이 우리에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21:18). 우리는 신앙이 어릴 때에 예수님의 어린 양으로 어린 아이와 같이 달라고 하기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탁하신 어린 양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21:15-17). 우리는 예수님의 양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이 부탁하신 어린 양들을 섬기는 목자입니다. 이에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 신앙의 연륜이 있는 신자는 교회 일을 열심히 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믿음이 좋다는 칭찬을 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직분에 맞는 대접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분을 주신 것은 섬김을 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 베드로가 경고한 대로 양 무리를 치되 직분 때문에 “억지로” 하거나 “더러운 이득”을 위해 하거나 “주장하는 자세”로 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섬김받고자 하는 죄의 속성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섬기는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 받고자 하는 제자는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억지로 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않고 자기 희생을 하며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않고 섬기는 자세로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는 예수님이 고난받으신 것처럼 고난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특히 섬김의 고난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을 사용하셔서 제자들의 섬김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종은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합니다. 이것은 유대의 속담으로 주인과 종의 관계와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종이나 보냄을 받은 자의 무익함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대조시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고 제자들은 그의 보배로운 소유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제자들에게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보내신 분이고 제자들은 그 명령을 수행하는 대리인입니다(마 28:18-20; 막 16:15-18).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겸손의 본을 보이시기 위해 스스로 종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주인이 종처럼 낮아져 섬기고 보낸 자가 보냄을 받은 자를 낮아져 섬긴다고 해서 그 근본 신분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께서 사람이 되셨고 종의 형체를 취하셔서 제자들을 섬긴다고 해서 제자들과 신분이 뒤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장군이 사병의 발을 씻어준다고 해서 장군의 지휘 명령권이 박탈되거나 그 권위를 상실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섬김을 통해 섬기는 자의 인격에 감동을 받고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체험하게 됩니다(1:14). 사도 요한은 후에 “생명의 말씀”을 들었고 보았고 자세히 보고 손을 만지는 영광과 은혜에 감동되어 요한일서를 썼습니다(요일 1:1-2). 그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영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인이 종을 섬기고 보낸 자가 보냄을 받은 자를 섬길 때 섬김을 받는 사람은 이를 통해 감동과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장벽이 가로막혀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어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고 인생들을 섬기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요일 4:19).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보내신 종들을 통해 발 씻음을 받게 되었고 이런 실제적인 섬김을 통해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를 간접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행하면 복이 있습니다. 

17절은 “복이 있으리라”라고 함으로 요한복음의 산상수훈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권세를 부리고 지배하면 행복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높은 자리에 앉으면 하나님이 축복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는 일이 잘 되어 풍족함을 누리면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다른 사람의 무시를 받고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는 사람의 위치에 있다면 복을 받지 못한 것으로 여깁니다. 심지어 자신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고 계신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복된 자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를 깨달은 자입니다. 그가 창조주이시지만 사람이 되셨고 종의 형체를 취하심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것인가 깨닫는 자는 행복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섬김의 길, 고난의 길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이 가장 영광스럽다는 것을 알고 실제 삶에서 섬김을 실천하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반면 세상 나라의 군림의 법칙을 숭배하고 이를 추구하는 자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불행한 자입니다. 그가 비록 떵떵거리며 부를 누리며 만족스러운 삶을 산다고 하지만 그 안에 영생이 없으므로 그는 가장 불행한 자입니다. 고난과 역경은 육신적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절망시키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로 보면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가장 좋은 선물이 됩니다. 섬김의 도리를 실천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행복이 배가되지만 섬김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행복이 감소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섬김의 깊고 넓은 세계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낮아지고 겸손하게 섬기는 삶보다 더 깊은 지식은 없고 더 풍성한 행복은 없습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자는 죄에 순응하는 자이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하나님의 법에 순응하는 자이므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18-30)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을 받는 대상은 열두 제자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에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그가 기대했던 메시아가 아님을 깨닫고 배반하였습니다. 그는 잘못된 메시아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열두 제자 중에 배반자가 나왔다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선택에 잘못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구절은 시편 41:9입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여기서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는 다윗의 배반자 아히도벨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는 다윗의 모사로 판단력과 지혜가 뛰어났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없어서는 안될 친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이 그의 아들 압살롬에 의해 배반을 당할 때 그는 압살롬의 편을 섰습니다. 그는 악인의 편의 섰고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나귀를 타고 고향에 돌아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삼하 17:23). 그가 간 길은 배반자 유다의 길과 흡사하였습니다. “내 떡을 먹는 자”는 가족과 같이 떡을 나누며 먹는 친한 사이를 말합니다. “발꿈치를 들었다”는 말은 길들여지지 않은 고집 센 말이 그를 돌보고 먹이를 주는 주인에게 발길질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말은 주인에게 발길질을 하고 그 위를 넘어갑니다. 또한 “발꿈치를 들었다”는 표현은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기 위해 발을 드는 동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는 “나는 당신과 상관이 없다”는 표현을 할 때 취하는 동작이었습니다(눅 9:5; 10:11). 다윗이 아히도벨에게 배반의 아픔을 겪은 것과 같이 예수님도 그의 사랑하는 제자 유다에게 배반을 당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메시아의 그림자로 그가 쓴 시편은 메시아를 암시하는 예언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반자에 의해 죽음을 당하신 것은 그의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성경에 예언된 것으로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배반자에 대해 미리 말씀하시는 이유는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믿게 하려 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편 41:9 말씀을 기초로 그가 어떻게 배반을 당하실 것이라는 구약 성경의 예언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약 성경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가 되심을 믿게 하려고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많은 곳에서 구약 성경의 예언을 인용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약속하신 메시아이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예언의 성취는 예언의 진실성과 권위를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 41:9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에 의해 배반당하여 죽으실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구절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어떻게 이렇게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제자에 의해 배신을 당하여 죽으실 것이라는 것까지 예언할 수 있는가 하며 놀라워 할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당장은 듣기 불편하고 심각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 예언하셨을 때 반발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따로 불러 책망할 정도였습니다(마 16:22; 막 8:32). 그러나 예수님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그의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예방 주사를 놓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충격적인 체포와 심문과 십자가의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이것이 우연히 일어나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예수님이 제자 중 한 사람에 의해 배반을 당하시고 죽으실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당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리 말씀하신 것이 성취된 것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내가 그인 줄” 믿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사건 후에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선교 대명령을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제자에서 사도가 될 것입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그들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들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도록 하십니다(마 28:18-19). 제자들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로서 예수님이 부여하신 권세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입니다(마 18:18). 그들의 입에 생사 여탈권이 부여됩니다. 그들을 영접하는 자, 곧 그들이 전한 복음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이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을 배척하는 자, 곧 그들이 전한 복음을 배척하는 자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고 이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드디어 자신의 심정을 제자들에게 토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배반과 죽음으로 인해 마음이 몹시 힘드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그 슬픔이 다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열두 제자들은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배반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유다는 제자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다른 사람을 속일 줄 아는 아주 능숙한 연기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약 1년 전 제자들에게 제자 중 하나가 배반할 것이라고 선언했었습니다(6:70).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의 배반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심령이 괴롭다는 표현은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때가 가까이 오자 배반의 쓰라림이 더 크게 다가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을 생각할 때 마음이 힘드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그의 제자가 그를 배반한 것에 대한 아픔이 더욱 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겪는 심적 고통을 다 느끼십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환난 중에 괴로움을 토로하듯 예수님도 그의 솔직한 심정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신적 능력을 가지신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배반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 고통이 덜할 것이라는 생각도 역시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배반의 고통을 겪듯이 예수님도 똑같이 배반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제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예수님이 누구에 대해 말씀하시는지 의심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뜬금없는 소리같이 들렸습니다. 그들은 “누가 크냐?”에 예민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제 곧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꾸 불길한 말씀을 하시니 불안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생사고락을 같이한 자기 동역자들의 형편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감각하게도 가룟 유다의 이상한 행동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엉뚱한 말씀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3절에서 “그가 사랑하시는 자”는 요한을 말합니다. 이 구절은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자기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로 언급한 첫 구절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나누는 것과 같이 그가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사귐(교제)”라는 독특한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요일 1:3). 그가 강조하는 교제는 성육신하신 예수님과의 사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생명의 말씀”으로 표현했고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라고 표현했습니다(요일 1:1-2). 그의 서신에 그가 반복해서 강조한 주제는 “사랑”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그를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했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그 사랑을 받고 있는 제자들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간증적 표현입니다. 그는 “예수를 사랑하는 제자”라고 표현하지 않고“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하고 자신의 이름을 생략함으로써 그는 독자의 관심을 자기보다 예수님께 더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과 같이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보다 그가 증언하는 대상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한 제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고 표현했고, 25절에서 “예수의 가슴에 의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 몸을 한쪽으로 기대어 왼쪽 팔꿈치로 몸을 받치고  무릎은 구부린 채로 뒤로 향하게 하고 오른손으로 음식을 접어 먹었습니다. 보통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먹던 식탁은 안락 의자가 딸려 있고 U자 형태로 된 식탁에서 빙둘러 식사를 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U자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가운데 뚫려 있는 곳으로 사람이 음식을 갖다 놓을 수 있도록 접근이 가능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오른편에 앉아 왼쪽으로 몸을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품에 안긴 모습이 되어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요한에게 머릿짓을 하여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베드로는 직접 예수님께 질문할 수 있었으나 그 자가 누구인지 조용히 알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감히 예수님을 팔 생각을 하는가?”라고 생각하며 이를 괘씸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는 열두 제자 그룹의 리더로서 이 문제를 나서서 처리하고자 하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만찬 자리에서 가룟 유다의 배반에 대해 세 번이나 언급하셨습니다(11,18,21). 아무리 제자들이 무신경하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배반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그룹의 리더인 베드로는 진상을 파악하여 대처를 해야 했습니다. 베드로의 머릿짓만으로도 감각과 눈치가 뛰어난 요한은 금방 그 신호의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에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릴 만큼 예리한 자였습니다(21:7). 이는 또한 요한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말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그가 예수님을 매우 사랑했고 예수님도 그를 특별하게 사랑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주여 누구니이까?”라고 속삭이며 물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 바로 옆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여기서 말하는 떡은 유월절에 먹는 무교병을 가리킬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떡(빵)을 먹을 때 양고기와 여러 채소를 넣어 만든 스튜에 적셔서 먹었습니다. 보통 만찬을 하면 주인은 귀한 손님에게 떡을 떼어 소스에 적셔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 한 조각을 적셔 주는 것은 유다에게 주는 마지막 사랑이고 그가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직접 빵을 건네줄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과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23절에서 요한이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는 표현으로 보아 요한은 예수님의 왼편에 있었고 유다는 그 오른편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 자리는 주의 좌우편에 해당하므로 영예로운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이 유다에게 빵조각을 건네준 것은 귀한 손님에게 베푸는 관습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영예로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1절에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는 표현에서와 같이 배반자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이 마지막 자비의 기회를 걷어 찬다면 이 빵조각은 ‘저주의 빵조각’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유다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일을 빨리 하도록 재촉하고 있습니다.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예수님은 분명히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그 떡을 받아먹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제자들 앞에서 공적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죄를 회개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유다의 선택은 ‘저주의 떡조각’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기로 정했습니다. 이 선택은 오래 전에 정한 것으로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고의로 조각을 받음으로 그의 결정을 확정지었습니다. 저자는 그가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그가 떡조각을 받기 전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떡조각을 받은 후에는 사탄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무한히 참으시고 기다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바로 돌이키고 영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때가 한 사람의 인생에서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고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먹이가 되어 삼키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마지막 기회가 지나가자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유다가 종교 지도자들과 의논하여 예수님을 체포하는 작전을 말합니다. 이미 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결의한 상태였습니다(마 15:15-16).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제자들은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라는 말을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명절에 쓸 물건을 사러 보내거나 가난한 자에게 무엇을 주라 하는 것으로 착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이야기의 저자로서 유다가 배반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 옆에 있으면서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의 심정을 가장 잘 읽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유다가 배반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정말 그가 계획한 것을 실행에 옮길 줄 몰랐을 것입니다. 또한 그의 배반이 그날 밤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제자의 배반이라는 불길한 말을 듣기는 했지만 먼 미래에 일어날 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가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다면 그는 다른 제자들에게 귓속말로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명절에 쓸 물건이라고 생각한 것은 유월절 명절이 곧 바로 무교절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들의 먹을 것이나 명절을 지내기 위한 필요한 물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다는 제자 그룹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물건 구입은 유다의 몫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유월절과 무교절 명절에 유대인들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도 다른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구제를 하듯 유다를 통해 구제하는 일을 하도록 시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유다가 떠나갈 때가 밤이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은 저녁 때 이루어졌기 때문에 저자가 이 표현을 굳이 넣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의도적으로 넣은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밤에 찾아왔다고 기록했습니다(3:1). 이는 실제로 니고데모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밤에 찾아왔다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할 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이 밤같이 어둡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이 주시는 떡조각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마지막 기회를 저버리고 배반을 실행에 옮긴 것을 말합니다. 떡조각을 받음으로 그는 이미 예수님께 속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27절에서 언급하였듯이 사탄이 이미 그에게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는 어둠의 지배로 넘어가 마귀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었지만 유다는 그 빛을 받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어둠은 불신과 배척을 의미합니다. 어둠에 다니는 자는 넘어집니다(11:9). 빛을 잃고 어둠에 있는 자들은 십자가 사건 후 낙향한 제자들과 같이 헛수고만 하게 됩니다(21:3). 니고데모는 밤과 같은 내면을 안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에게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3:2-3). 예수님은 그에게 광야에서 높이 달린 뱀을 볼 때 살아나듯 “인자도 들려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3:14-15).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믿을 때 어둠에서 나와서 생명의 빛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어둠의 세력을 이기고 빛으로 나아올 수 있습니다. 유다는 이 빛을 거부하고 어둠의 길을 선택한 자였습니다. 유다의 길을 가는 자들은 어둠의 지배를 받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라는 구절은 요한이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는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1:11).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31-35)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님께서는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떠남으로 이제 곧 그의 체포와 십자가의 수난이 다가올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가리켜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표현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12:20에서 유대인의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온 헬라 사람들 몇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23).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때가 유다가 떠남으로 현실화되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약속하셨던 인류 구원역사가 완성이 되고 그의 부활하심으로 인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께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심으로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행 5:31). 저자 요한은 “곧 주시리라”라는 말을 덧붙임으로 그 일이 곧 이루어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열한 제자와 더불어 마지막 밤을 보내시면서 고별 메시지를 말씀하시고자 하십니다. 이제는 배반자 유다가 떠남으로 그가 하시는 말씀에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13:31-17:26에 걸쳐 주옥 같은 고별 메시지를 길게 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가리켜 ‘다락방 강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제자들 곁을 떠나십니다. 이는 마치 모세가 죽기 전에 여호수아와 백성들을 앞에 두고 고별 메시지를 전한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신 31-34장).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작은 자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말은 Little children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에 대한 강한 가족적 사랑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호칭은 요한복음에서 오직 이 곳에만 나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7번이나 이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부모가 애정어린 목소리로 자식을 부를 때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신도 성도들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작은 자들아”라고 부르신 예수님의 음성에는 자녀들에 대해 걱정이 가득한 부모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대한 개념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좀 더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을 것이나 그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7:34에서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같이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많이 의존하였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신 후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자 제자들을 먼저 배 태워 보낸 후 홀로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잠시 예수님과 떨어져 있었는데 폭풍을 만나자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건너 제자들에게 오면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시자 제자들은 안심하였습니다(6:16-21). 이렇게 잠시 떨어져 있는 것도 힘들어 하는 것이 현재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위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14: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녀를 놓아두고 멀리 떠나는 것과 같이 염려가 되셨습니다. “작은 자들아”라고 하시는 것은 부모의 자애로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자녀들이 작고 어릴 때에는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며 연약합니다. 이때 어리고 작은 자녀들에 대한 부모들의 사랑은 더 욱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기가 죽기 전에 그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 별로 없으실 것이고 부활 후에도 그들과 그리 오래 함께 하지 못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제자들만 남겨둔 예수님의 심정은 염려의 애정으로 가득하였습니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다락방 강화에서 제일 먼저 부탁하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보여주신 섬김의 본을 따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보통 감정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의 마음에 들면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랑스럽지 않게 여깁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감정의 호불호에 따라 갈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닌 예수님이 실천하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배반한 가룟 유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감정대로 하자면 가룟 유다가 매우 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는 열두 제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은 사랑할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밥 먹듯이 버렸고 언약을 배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깨닫고 돌이키게 하시고자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선지자를 박해하였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은 이방 세계까지 의미합니다. 이방 세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죄의 소욕을 좇아 함부로 살므로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이방 세계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감정처럼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외가 없는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할 자격이 없는 자를 사랑하는 일방적이고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목숨이 다하기까지 온전히 자신을 다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1). 이제 몇 시간이 지나면 예수님은 체포되시고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마지막으로 사랑의 행동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보여주신 사랑을 제자들도 그대로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 간에 서로 발을 씻기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 하면서 경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유언적 명령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새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새 계명”이라는 말을 언뜻 들으면 그 동안 없었던 계명이기 때문에 “새 계명”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서로사랑하라”는 계명은 모세의 율법에도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9:1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 와이니라” 요한도 요한일서 2:7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라고 썼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하신 것은 그 어떤 계명보다 중요하고 으뜸이 되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구약 성경에 친숙하였으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결코 새로운 계명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허리를 숙이시고 종의 모습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상식에도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이미 말씀하신 것이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정확히 잘 몰랐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사랑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하늘 영광과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으로 오셨고 종이 되어 우리 인생들을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보고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임을 알았습니다(1:14). 그러나 그들은 성육신하신 예수님과 같이 다니면서 배웠지만 예수님의 명성으로 인해 그들의 인간적인 야망이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메시아 관으로 인해 영광받으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서 영광을 받을 것에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들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섬기심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른 사람의 발까지 낮아져서 종이 되셔서 발을 씻기신 것을 보자 한방 얻어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 것도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이 걸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발까지 낮아지셔서 섬긴 것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이전에 들어보거나 목격하지 못했던 “새 계명”으로 와 닿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새 계명”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친히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네 자신과 같이”라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바꾸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새 계명”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합니다. 몸이 아프면 쉬어 주고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먹습니다. 매일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며 화장품을 바르고 머리 손질을 합니다. 건강을 위해 매일 운동을 하며 바깥 날씨에 맞추어 옷을 입습니다. 이처럼 형제들에게 관심을 갖고 돌봐주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 자신과 같이”라는 말에는 성육신의 의미가 담겨있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발까지 낮아지는 ‘낮아짐’의 겸손은 없습니다. “네 자신과 같이”는 자기로부터의 출발이지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는 예수님으로부터의 출발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기준을 더 강화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새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계명이라는 것은 권면이 아니라 명령으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령하신 이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또한 명령으로 주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끔찍히 사랑하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선택적으로 합니다. 또한 그 사랑은 자기 감정에 기초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빌 2:3). 그러면서 바울은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를 길게 설명하였습니다(빌 2:5-8). 우리는 자기 감정에 기초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명령하셨으므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같이 낮아져 섬기는 자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반면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된 것이고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줄을 압니다(요일 2:4-5). 요한은 형제 사랑은 빛에 거하는 자와 어둠에 거하는 자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요일 2:10-11).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에 거하는 자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속하는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공동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달리 거룩해야 하고 사랑이 풍성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사람들이 빛 가운데로 나아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의 탁월성에 대해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팔복에 대해 말씀하심으로 복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12). 팔복만 보아도 세상의 복의 개념과 상반된 차이를 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이 가져야 할 수준 높은 도덕적 잣대를 제시하셨습니다(마 5:20). 예수님의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고,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21-32).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5:38-42). 예수님은 제자들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제자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께 영광을 돌리게 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마 5:16).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 사랑’은 제자의 탁월성의 절정입니다(마 5:43-48). 사람들은 믿는 제자들의 탁월성에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설령 당장 그들이 믿지 않더라도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할 마음의 빈 자리를 남겨두게 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요한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왜 “새 계명”으로 주셨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저절로 믿음의 사람들끼리 사랑의 공동체가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죄악된 인간의 본성 때문에 믿는 자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두고 서로 “누가 크냐?”고 하면서 경쟁하는 것을 보면 믿는 사람들조차도 높아지고자 하고 다른 사람의 밑으로 낮아지는 것을 거부하는 죄악된 본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였는데 우리의 속마음은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지 않습니다(빌 2:3). 사랑하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본성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서로 사랑하고자 내적인 투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에 앞서 먼저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낮아져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회적으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1). 예수님께서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것에서 사랑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땅에 낮아져 오신 자체가 감동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적입니다(눅 2:12).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지만 가장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가장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더럽다고 하고 부담스러워 하는 병자들과 죄인들을 섬기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선한 목자로서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자기 목숨을 버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은 일회적인 쇼가 아닙니다. 낮아져 섬기는 사랑은 예수님의 삶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모본을 보여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들에게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욕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교회다니는 사람들에게 높은 도덕적, 인격적 수준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는 말씀 가운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교회를 귀하게 여기시는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 그의 빛을 비추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교회를 통해 말씀하시고 교회를 통해 구원의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교회가 서로 사랑하지 않고 불화한다면 예수님의 구원의 계획에 걸림돌이 됩니다.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고 그 안에 영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요일 3:15).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십니다. 만일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요일 3:24). 교회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주님은 죽은 교회를 통해 일하실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이라는 근육과 힘줄로 하나가 되어 연결될 때 생명이 유지되고 살아있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가 무너지면 신앙의 모든 근거가 사라지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내 안의 믿음의 뿌리가 흔들리게 되고 결국 사탄이 가장 기뻐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탄이 가장 즐겨 먹는 먹잇감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구주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구원과 영생을 주셨는데 이 은혜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교회 공동체를 귀하게 여기고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입니다. 

베드로의 실패를 예언하신 예수님(36-38)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 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는 33절의 말씀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라는 말을 받아 질문하였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디로 가신다는 말에 신경이 쓰여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듣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이 불안하여 ‘서로 사랑’의 주제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제자들이 따라갈 수 없는 먼 나라로 가시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후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자들을 떠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오실 것입니다(14:18).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은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사러가는 아버지처럼 제자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에게 줄 선물은 보혜사 성령입니다. 예수님은 위로자 성령을 보내시기 위해 떠나십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은 하늘로 가는 길을 여시고 하늘의 그들이 하늘의 모든 보화를 소유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으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대속의 사명은 그의 사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온전히 예수님만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한 대속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흘림으로 대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형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대속제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그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는 따라올 것입니다. 시간이 오면 베드로에게 부여된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도 또한 예수님을 위해 죽을 것입니다. 이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르는 죽음입니다. 복음의 씨를 뿌리는 순교의 피를 흘리는 죽음입니다. 그 후 영광의 나라에 초대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순교할 수도 있고 예수님을 위해 오래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강을 건널 것입니다. 예수님은 “후에 따라오리라”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그의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따라 하늘로 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은혜의 언약은 확고하고 반드시 실현됩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결코 헛되이 흘린 것이 아닙니다. 그의 기도와 사역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거두는 것과 같이 수많은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땅에 남아 그 열매를 거두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은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이끄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이 땅에서 어딘가 멀리 가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의 이런 반문은 “주님, 제가 왜 지금 주님을 따를 수 없단 말입니까? 주님은 주님을 향한 저의 사랑을 의심하고 계십니까? 저는 절대 주님을 배반할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곧 이어서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가 하는 말을 과연 실천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말과 행동이 먼저 나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성격은 요한복음 21장에서도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제자들은 다시 물고기를 낚으러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그들은 3년전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처럼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21:6). 요한은 이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신줄 감각적으로 알아차리고 “주시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라는 말을 듣고 본능적으로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21:7). 이처럼 베드로는 앞뒤 안가리고 행동부터 나오는 행동파였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로서의 자부심이 매우 강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위험한 길이지만 목숨을 버리고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한 한 번만 말한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맹세했습니다(마 26:33,35).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막 14:30)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세 복음 서 기자들은 횟수는 언급하지 않고 단지 “닭 울기 전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횟수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미 마가가 언급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베드로는 닭이 두 번째 울고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는 내용을 기록했습니다(마 26:75; 눅 22:62). 베드로가 그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예언한 것은 예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잘 이해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미리 말씀하신 것은 그가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그가 겪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완화시켜 주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도록 도우시고자 하셨습니다. 자기를 의지하면 실패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항상 승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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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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